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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시대, 미국에 변화는 올 것인가
[최을영의 시사인물 포커스] 최초의 흑인 대통령 아닌 성공한 대통령 될까
 
최을영   기사입력  2008/11/27 [16:27]
변화와 통합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할 것인가.' 나는 지난 2007년 4월 이 지면에 실린 오바마에 대한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버락 오바마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민주당 내 경선에 참여할 뜻을 비친 이후 힐러리 클린턴의 '악몽'으로 급부상하고 있을 때였다. 힐러리를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진 않았지만 당시 오바마는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고, 그 기세대로라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될 수도, 또 미국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오바마의 약점으로 꼽힌 일천하고 검증되지 않은 정치 경험, 그리고 예측하기 힘든 난제 등이 오바마의 발목을 어느 때든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할 것인가'란 물음을 글 첫머리에 올렸던 이유는, 개인적으로 흑인 대통령의 탄생을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2008년 11월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압도적인 표차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를 제친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오바마는 당선 직후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선거를 치르면서 오늘 밤 미국에 변화가 찾아왔다."1)
 
아울러 그는 통합에 대한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오바마는 공화당이 배출한 에이브러햄 링컨의 예를 들며 화합을 강조했다. 우선 그는 "공화당은 독립심과 개인의 자유, 국가 통합의 가치 위에 세워진 당"이고, "이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라며 "지금보다 훨씬 갈라져 있던 시절 링컨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이 나라에서 우리는 한 몸으로 뜨고 진다"고 통합을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의 답변(선거 결과)은 청년과 노인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흑인, 백인, 히스패닉, 아시아계와 아메리카 원주민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의 것"이라며 하나의 미국을 강조했다.2)
 
언론에서는 오바마의 당선을 두고 미국이 변화를 선택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인들은 변화를 선택했는가. 2008년 11월 6일자 『경향신문』 사설은 오바마를 소수자라 칭한 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무엇이 그런 인물을 미국 대통령에까지 끌어올렸나. 그의 넘치는 카리스마와 조직 역량인가, 미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인가, 막판에 호재로 작용한 금융위기였나. 답은 그 총합일 것이다. …… 오바마의 인물론과 함께 꼽아야 할 것은 전임 부시 대통령의 실정이다. 매케인 후보는 부시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해 무진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끝내 부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중대한 패인이 됐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선거는 매케인의 패배이자 동시에 부시도 확실한 패배자다. 오바마의 진보성과 열정, 젊은 패기를 승인으로 꼽는 데 인색할 이유는 없지만 공화당 패배의 원인도 함께 살펴야 할 이유다."3)
 
▲     ©버락 오바마 공식 홈페이지

대선 직전 미 국민의 85%가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밝힌 것처럼 미국인들은 부시 정부의 실정에 질려 있었다. 오바마는 이들에게 변화를 역설했다. 2008년 11월 6일자 『한겨레』 사설은 오바마의 당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바마는 깊은 실망의 나락에 떨어진 국민에게 변화의 이미지로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케냐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로,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대통령에 도전한 자신을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내세우며, 미국인들이 잊었던 꿈을 자극했다. 부패한 정치와 미친 듯이 한쪽으로만 치우친 나라 안의 분위기를 변화시키자면 풀뿌리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돼야 한다는 믿음에 따라 풀뿌리 공동체 조직가로 공적 경력을 시작한 그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 새로운 정치조직을 가동해냄으로써 지난 30년 동안 미국 정치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감동을 창조해내는 데 성공했다. 미국인들은 단합을 화두로 내세운 그의 호소에 응답함으로써 부시의 일방주의, 레이건 이래의 시장중심 자본주의, 그리고 인종주의의 과거와 결별을 선언했다."4)
 
오바마는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 이제 그에게는 자신이 내세웠던 변화를 재임기간 동안 이끌어내는 것만 남았다. 물론 월가의 금융위기로 촉발된 미국 경제 악화로 그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과연 오바마는 미국의 변화를 이끌어낼 것인가. 지켜볼 일이다.  
 
경계의 삶
 
버락 오바마는 1961년 8월 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케냐 유학생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버락이라는 이름은 스와힐리어(탄자니아와 케냐에서 쓰이는 언어)로 '축복받은 이'라는 뜻이다. 오바마의 부모는 하와이대학에서 만나 사랑을 키웠지만 오바마를 낳고 2년 뒤에 결별했다. 아버지는 케냐로 떠났고, 오바마의 어머니는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했다. 1966년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인도네시아에 간 오바마는 어린 시절을 인도네시아에서 지냈다. 오바마의 어머니는 교육에 헌신적이었다. 오바마는 한 주에 5일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마틴 루터 킹의 연설문을 읽는 등 3시간 동안 영어를 공부해야 했다.
 
열 살 되던 해에 어머니의 파경으로 하와이로 돌아오게 된 오바마는 이해 크리스마스에 아버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게 된다. 하와이를 찾은 아버지는 오바마에게 농구공을 선물했고, 오바마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농구에 몰두했다. 고교시절 그는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운동으로 농구를 꼽는다.
 
그의 가족은 흑인, 백인, 동양인 등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는 오바마의 다양한 가족 구성원을 두고 "미니 유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바마는 고등학교 시절 인종 문제로 정체성에 혼란을 겪어야 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던 그는 자신이 혼혈임을, 또 흑인임을 미국 사회에서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는 완전한 백인도, 완전한 흑인도 아닌 경계선에 서 있었고, 그 경계가 주는 혼돈스러움을 겪어내야 했다. 술과 담배, 마약에도 손을 댔다. 이 시기 그를 감싸 안은 것은 외할머니였다. 미국의 일간지 『시카고 트리뷴』은 "오바마의 어머니가 세계를 보는 눈을 키워준 '날개'였다면, 외할머니는 바위 같은 안정감과 미국인으로서의 뿌리를 심어줬다"며 대선을 이틀 앞둔 11월 2일 사망한 오바마의 외할머니가 미친 영향을 한마디로 평했다.
 
후일 오바마는 "나는 여러 인종의 혈통과 문화를 물려받은 흑인의 눈으로 미국을 경험하게 됐다. 인종과 계층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꿔 놓을 것인지 영원히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또 "흑과 백의 두 세상에서 줄을 타는 법을 익혔다"라고 자서전에 적었다.5)
 
오바마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더 높은 곳을 향했다. 오바마는 자신이 느낀 인종에 대한 편견, 그리고 인종에 따른 정체성을 승화시켜 하나의 공동체, 즉 미국이라는 공동체로 승화시키게 된다. 오바마는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흑인으로) 바라본다 해도, 그런 깨달음은 닻을 내릴 곳을 찾지 못한 채 떠돌고 있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더 큰 미국이라는 공동체, 흑인과 백인과 아시아인을 모두 포괄하는 공동체"를 떠올렸다.6) 백인의 미국도 아닌, 흑인의 미국도 아닌 하나의 미국을 설파하는 오바마의 주장은 이런 경험에서 기인한다.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오바마는 로스앤젤레스의 옥시덴털대학을 다니다가 1983년 뉴욕 콜롬비아대학에서 정치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뉴욕의 컨설팅회사에 잠시 몸담아 자신의 정치적 고향이 되는 시카고로 향한다. 1985년의 일이었다.
 
이곳에서 오바마는 도시빈민운동에 투신했다. 교회와 시민단체를 기반으로 해서 풀뿌리 사회운동을 시작한 오바마는 이곳에서 보통 흑인들의 삶을 체화한다. 아이비리그 출신의 엘리트 흑인이었던 오바마는 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에서 주민들의 주거 및 교육운동에 나섰다. 그는 이때의 경험이 정치력과 소통 능력을 키웠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스타의 탄생
 
시카고에서 도시빈민운동 활동가로 3년 동안 일한 뒤 오바마는 "빈곤과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와 권력에 대해 알아야 한다"며 하버드대 로스쿨에 들어간다. 이 당시 그는 로스쿨 학회지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하버드 로 리뷰'의 첫 흑인 편집장이 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     © AP통신

아울러 그는 이 당시 평생의 반려자인 미셸 로빈슨을 만나게 된다. 하버드대학에서 수학 중이던 어느 여름방학 때 그는 시카고의 로펌에서 미셸을 만났다. 그러나 세 살 연상의 미셸은 로펌의 내부 규정을 근거로 오바마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지만 결국 마음을 열어 1992년 그와 결혼했다.
 
결혼보다 한 해 빠른 1991년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오바마는 시카고에서 민권소송 전문변호사로 활동하는 한편 시카고대 로스쿨 교수로 일했다. 오바마가 정계에 입문한 것은 1996년 시카고에서 주의원으로 당선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게 된 이유를 '깨진 정치과정을 수리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그가 저서 『담대한 희망』에서 밝힌 "우리는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건국의 가치와 이상을 공유하는 하나의 미국인"이라는 국민통합론도 정치 입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오바마는 아직 풋내기에 불과했다. 그런 그를 스타로 탄생시킨 것은 2004년 7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행한 하나의 연설이었다. 당시 존 케리 대선후보에 의해 기조연설자로 선정된 오바마는 이날 연설에서 "진보적인 미국, 보수적인 미국은 없다. 흑인의 미국, 백인의 미국, 라틴계의 미국, 아시아계의 미국도 없다. 하나의 미국이 있을 뿐이다. 불안 속에서도 담대한 희망을 갖자"고 역설했다.7)
 
또 그는 "국민들은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가 해결해야 할 우선순위를 조금만 바꾸면 미국의 모든 아이들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기회의 문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국민들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선택을 원한다"고 강조했다. 이라크전에 대해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군대를 파병하지 않거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없거나, 세계의 존경을 얻을 수 없다면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며 전쟁 반대를 분명히 했다. 그리고 "우리는 국기 앞에 맹세하고 미국이라는 나라를 지켜낼 하나의 국민"이라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 지으며 국민통합론을 강조했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오바마를 만난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의 태평스런 태도, 그의 뻔뻔스런 유머에는 뭔가 흑인 클린턴 같은 데가 있다. 하버드대학 출신의 반항아가 발산하는 매력……. 어쩌면 그는 이제는 죄의식에 호소하길 그만두고 매력을 행사해야 함을 이해한 최초의 흑인이 아닐까?"

앙리 레비의 이 말은 오바마란 흑인이 이전 세대의 흑인 정치인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흑인 정치인이라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즉 오바마는 흑인 차별에 대항하는 흑인 정치인, 미국인들에게 '흑인 차별'이라는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흑인 정치인이 아니라 매력을 발산해 미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초의 흑인이라는 말이다.
 
어찌됐든 미국인들은 젊은 흑인 정치인의 열정적인 연설을 통해 한 명의 정치 스타가 출현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를 기반으로 오바마는 2005년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다. 오바마는 참신함을 기반으로 지지층을 넓혀갔고, '차세대 주자'로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그의 자서전은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클린턴 전 대통령은 그를 "대통령직에 필요한 지성과 강인함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하면서 "너무 일찍 나서는 데는 신중할 것"을 충고하기도 했다.  
 
참신함과 연설의 힘
 
상원의원이 된 지 2년 만에 대권에 출사표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또 '록스타'와 같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바마가 가진 참신함에 있다. 오바마는 베이비붐 이후 세대다. 100명의 상원의원 중 두 번째로 나이가 젊다. 이에 비해 오바마와 경쟁하는 정치인 모두가 베이비붐 이전 세대다. 오바마는 베이비붐 세대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미국인들의 허전함을 파고들었고, 그것이 오바마 신드롬을 설명하는 요인이 된다. 오바마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기 전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우리의 정치는 돈과 권력으로 변질된 '빈약한 정치'"라며 "우리 모두의 색다른 정치에 대한 갈망을 깨닫고 변화와 진보의 대의를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상당 기간 고민해왔다"고 말했다. '빈약한 정치'를 바꾸겠다는 그의 이 말은 그가 가진 참신함을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젊다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가 상원의원으로 활동한 기간은 고작 2년이다. 정치경력이 일천하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미국의 일간지 『USA 투데이』는 2007년 1월 17일자 「오바마에 대한 큰 의문」이라는 기사에서 "지난 2005년 상원의원 당선,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7년, 지난 2000년 하원의원 선거 실패,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단 한 번의 뛰어난 연설로 두각, 두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오바마 정치 이력서의 전부"라며 "이것이 그가 대통령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인가?"라고 그의 일천한 정치이력을 비판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이런 비판에 대해 "허영심과 야심만으로 추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대통령이 될 준비가 된 사람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리고 미 국민들은 일천한 정치이력보다 참신함에 더 높은 점수를 줬다.
 
오바마가 가진 또 하나의 힘은 바로 연설이다. 2004년 전당대회에서 행한 18분 동안의 연설로 스타가 된 이력에서 알 수 있듯 오바마는 연설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일가견이 있다. 『경향신문』의 최희진 기자는 오바마의 연설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오바마의 연설이 유권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이유는 내용(연설문)과 형식(전달력) 면에서 좋은 연설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오바마는 개인적인 경험을 연설의 소재로 즐겨 사용한다. '미국은 희망의 땅'이라는 내용을 말할 때 케냐 이민 3세인 자신도 상원의원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는 식이다.

'부모님은 저에게 '버락'이라는 아프리카식 이름을 주셨습니다. 관대한 나라 미국에선 이런 이름도 성공의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밤 그들이 저를 자랑스럽게 내려다보리라는 것을 말입니다.'(2004년 전당대회)

이처럼 연설의 내용이 말하는 이의 정체성과 일치할 때 청중은 연설자에게서 진정성과 호감을 느낀다. 오바마는 또 정책을 소개하기보다 비전을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둔다. 핵심어는 '변화' '희망' 등이다.

'한 번도 정치에 참여한 적이 없는 젊은 미국인들이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투표율로 선거에 참여했을 땐, 미국에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  부유하든 가난하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히스패닉이든 아시아인이든, 우리는 이 나라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변화, 이것이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1월 8일 뉴햄프셔 예비선거)

이는 힐러리가 정책을 구체적이고 직설적으로 나열한다는 것과 다른 점이다. 이 탓에 '오바마 연설은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군중들의 호응을 얻는 데는 오바마 스타일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연설 비서관을 지냈던 마이클 거슨은 지난 1월 미국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힐러리는 정책의 대가이고 매우 박식하다'면서도 '(힐러리의 연설 방식은) 듣는 이에게 반감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시적인 운율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안다는 것도 오바마의 장점이다. 그는 같은 구절로 시작하는 문장을 연이어 여러 번 말하는 기법을 즐겨 쓴다. 뉴햄프셔 연설에선 마지막 3분 동안 '우리는 ∼을 할 수 있습니다(Yes, we can∼)'를 무려 12회 반복했다."8) 

 
▲     © 로이터통신

정면 돌파
 
참신함과 연설의 힘을 바탕으로 오바마는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차근차근 해냈다. 2007년 2월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옛 주정부 청사 앞 광장에서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한 후 오바마는 2008년 1월 민주당의 첫 경선지인 아이오와에서 승리를 거두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 이후 오바마는 힐러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올 6월 초에 승리를 확정지었다.
 
오바마는 항상 미국의 상위 5%가 아닌 95%를 위한 정책을 수행하겠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2008년 8월 민주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우리는 경제의 힘을 억만장자들의 숫자나 포천 500대 기업의 이익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는지, 팁으로 살아가는 웨이트리스가 실직 걱정 없이 아픈 아이를 돌보기 위해 하루 휴가를 받을 수 있는지를 가지고 평가한다.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경제를 이루려 한다"고 말했다.9)
 
내가 보기에 오바마 공약의 핵심인 '노동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경제'는 현재 미국의 경제위기, 즉 금융으로 촉발된 경제위기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 물론 그에게도 악재가 있었다. 바로 인종 문제였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오바마는 이를 피하지 않았다. 2008년 3월 오바마의 정신적 스승인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의 '갓 댐 아메리카(빌어먹을 미국)'란 발언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인종 문제에 대해 정면 돌파를 감행했다.

"저는 케냐 출신 흑인 남성과 캔자스 출신 백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를 키워준 백인 외할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때 패튼 군단에서 복무했고, 할아버지가 바다 건너 전쟁터에 가 있는 동안 백인 외할머니는 폭격기 생산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들을 나왔고, 세계 최빈국 중 한 곳에 산 적도 있습니다. 노예의 피와 노예 소유주의 피를 함께 물려받은 흑인 여성과 결혼해서 이 혈통을 사랑하는 두 딸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피부색의 형제자매, 조카, 삼촌과 사촌들이 3개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연이 저를 일반적인 후보자들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밝히고, 그것을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행동은 오바마에게 자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장점으로 승화시킬 줄 알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민들에게 다가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 그는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를 비판했고, 노동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경제를 꿈꾸고 있으며, 믿을 수 있는 변화와 통합을 주장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를 해왔다. 아직 갈 길이 멀고, 당장 경제 문제가 발목을 잡으리라는 사실이 자명해 보이지만, 그에게 기대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그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만 머물지 않고, 대내적으로도, 또 대외적으로도 성공한 흑인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

 
[각주]
1) 김외현, 「오바마 당선 연설 "미국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한겨레』, 2008년 11월 6일, 3면.
2) 김외현, 「오바마 당선 연설 "미국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한겨레』, 2008년 11월 6일, 3면.
3) 「사설: 마침내 변화를 선택한 미국」, 『경향신문』, 2008년 11월 6일, 31면.
4) 「사설: 역사의 새 장을 연 오바마의 승리」, 『한겨레』, 2008년 11월 6일, 27면.
5) 김순배, 「미국 오바마 시대 개막/ 흑-백 사이 '슬픈 줄타기' 넘어 '코즈모폴리턴' 우뚝」, 『한겨레』, 2008년 11월 6일, 5면.
6) 김순배, 「미국 오바마 시대 개막/ 흑-백 사이 '슬픈 줄타기' 넘어 '코즈모폴리턴' 우뚝」, 『한겨레』, 2008년 11월 6일, 5면.
7) 김민아, 「방황하던 혼혈 소년, 빈민운동가로 꿈 키워」, 『경향신문』, 2008년 11월 6일, 5면.
8) 최희진, 「마음을, 세상을 움직이는 '연설의 힘' - '선거가 축제로' 대중 사로잡은 오바마 연설」, 『경향신문』, 2008년 3월 20일, SC면.
9) 「사설: 마침내 변화를 선택한 미국」, 『경향신문』, 2008년 11월 6일, 31면.

* 이 글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1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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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1/27 [16:2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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