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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0.1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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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Cine] 디 아더스 : 귀신도 섹스를 한다
 
공희준 Cinema Jockey
당신이 딸을 세계적인 골프스타로 출세시키고 싶은 사람이라고 가정해 보자.
딸의 담력을 키우기 위해 당신은 종종 어둡고 음산한 공동묘지에서 딸 혼자 스윙훈련이나 퍼팅연습을 하도록 한다.

그런데 요즘 딸이 공동묘지에 갈 때마다 짙은 화장을 한다. 혹여 딸이 훈련을 빙자해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밤마실을 다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 당신은 묘지에다 몰래카메라를 설치한다.

애초에 딸을 감시하려 설치했던 카메라에 귀신이 씌웠는지 화면에 귀신의 모습이 찍혔다. 촬영된 귀신은 소복 입은 처녀귀신이나 장가 못간 몽달귀신이 아니다. 카메라 속에선 준수한 남자귀신과 쭉쭉 빵빵한 여자귀신이 정열적으로 섹스를 즐기고 있다. 가증스럽게도 귀신 주제에 감히 피임도구까지 사용하면서 말이다.

{IMAGE1_LEFT}소리소문 없이 귀신처럼 한국영화시장에 상륙해 흥행돌풍을 일으킨 "디 아더스"는 귀신같지 않은 귀신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미 100만 명을 넘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관람했으므로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영화 후반 허를 찌르는 반전의 묘미에 대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궁금해하는 바인 "살았어요? 죽었어요?"란 질문에 감히 이렇게 대답해도 영화를 즐기는 맛이 김빠진 맥주처럼 싱거워지지는 않을 터.
"니콜 키드만 죽었어!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대"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기피사유로 제시하는 이유는 똥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것이다. 전율보다는 욕지기를 일으키는 기존의 공포영화와는 달리 "디 아더스"는 대단히 깔끔하면서도 철두철미 무서운 영화다. 이 영화에서 느끼는 두려움의 원천은 흥건히 흐르는 피도, 사방에 흩어진 잘려진 목과 팔다리도 아니다.

감독은 고정관념에 대한 약간의 비틀기를 통해 모골이 송연한 공포감을 선사한다. 패러디의 문법이자 키치의 수사학인 "물구나무 세우기"를 통해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는 72년생 쥐띠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능글맞고 노련한 연출로써 청결하고 위생적인 공포감을 제공하는 교묘한 수완을 발휘한다.

감독이 길어오는 공포의 수원(水源)은 인간의 무지와 맹목적인 편견이다. 이 무지와 편견은 인간으로 하여금 진실과 사실을 낯선, 즉 소외된 존재로서 받아들이도록 이끈다. 자신에게 낯선 모든 대상은 타자(他者 : The Others)로 딱지 붙여지고 그릇된 믿음에 사로잡힌 자아는 모든 타자의 존재와 출현에 격렬하게 저항한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아이들과 함께 쓸쓸히 지내는 주인공 그레이스의 몽매함을 깨우쳐 주기 위해 홀연히 나타나는 밀즈 부인과 다른 하인들의 등장은 동굴의 죄수들에게 진정한 이데아를 설파하는 플라톤의 애지자(愛知者)의 강림을 연상시킨다. 동굴의 어두운 벽면을 바라보다 처음으로 햇빛을 접한 죄수들이 힘겨워하는 것처럼 그레이스도 자신이 아이들을 살해하고 총으로 자살한 사건을 선뜻 수긍하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의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인간들처럼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남편의 혼백도 진실을 부정하는 그녀에게 절망한 나머지 한 차례의 섹스를 나눈 후 다시금 머나먼 길을 떠나게 된다. 초췌하고 얼빠진 표정의 남편 얼굴에 선명히 그어져 있는 깊은 상처자국은 그 역시 오래 전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진실의 바탕 위에서만 진정성 있는 따스한 관계의 구조가 성립한다는 교훈을 도출하는 것은 나만의 진부하고도 순진한 생각일까.

귀신에도 짬빱순이 있다고 그레이스의 몽매함과 어리석음을 고쳐주기 위해, 그리고 현세에서 가장 행복했던 추억을 피안에서도 영원히 간직하고픈 소망에서 50년전 결핵으로 사망한 선배 귀신들이 찾아온다는 설정은 젊은 감독만이 조율할 수 있는 엽기발랄한 코드이다. 아울러 역시 죽은 유령인 그레이스의 딸 앤과 소통하며 그레이스를 전율시키는, 그레이스에게는 귀신보다 더 무서운 인간 소년 빅터와 늙은 할머니 영매는 사회적 욕망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아이들과 노인들이 진실의 실체에 더 쉽고 기꺼이 가슴을 연다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겠다.

영화속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죽었다는 엄연한 객관적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여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사람은 당연히 귀신을 무서워해도 귀신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험적 전제의 포로가 되어 시종일관 두려움에 떨다가 영화 끝나기 10분 전에야 감독이 쳐놓은 간단한 트릭에 농락 당했음을 알아차린다.

유령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무척이나 낯선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침점심저녁 수시로 귀신을 만나고 유령과 부대낀다면 유령이나 귀신은 마치 옆집 아줌마나 거래처 아가씨처럼 별 특별한 감각이나 감흥을 야기하지 못하는 민숭민숭하고 밋밋한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감은 보편적이다. 이해되기 이전의 모든 사물과 사람은 두려운 존재다. 새로 온 신입사원이 회식 자리에서 폭탄주를 마시고 창자 속에 든 걸쭉한 내용물들을 항문의 출발점으로 역류해내기 전까지 그(녀)는 내 자리를 위협하고 호시탐탐 내 연봉을 추월하기만을 노리는 적대적 존재로 상정되어 진다.

인류의 역사는 항상 미지의 것을 탐구하고자 발버둥친 성공과 실패의 기록으로 점철되어 왔다. 인생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낯선 사람들과의 교류와 소통에 바쳐진 기나긴 시간의 궤적들이 그려내는 구불구불한 선들로 그려진 복잡다단한 다각형에 다름 아니다.

평생을 귀신으로 살아가야 할 이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은 오로지 예전에는 맛있게 느껴졌던 토스트가 더 이상 제 맛이 나지 않는다며 푸념할 때뿐이다. 이 장면에서는 나비의 꿈을 꾼 장자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나는 예전에 장자가 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에서 깨어난 지금까지도 내가 장자인지 장자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이따금씩 헷갈릴 때가 많다. 우리 집에서도 귀신쫓기 푸닥거리를 한바탕 해야하나 보다.

소통과 교류를 혐오하고 대화와 공존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인간은 익숙한 것들을 제외한 모든 대상이 제눈에 "악의 축"으로 비쳐지기 마련이다. 무지몽매에 눈멀어 자기가 귀신인줄 모르고 사람들을 외려 귀신이라 단정한 그레이스의 입장을 떠나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처지에서 판단한다면,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안개 자욱한 외딴 숲 속에 위치한 넓은 저택에서, 치유불능의 신경쇠약증과 애정결핍증에 감염되어 난리블루스를 춰대는 미모의 젊은 미씨족 귀신과 잠시 나마 같은 지붕 아래서 살아야 했던 인간들은 얼마나 소름끼치고 끔찍하게 기억될 경험을 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면 절로 입가에 가학적 미소가 서린다.

{IMAGE2_LEFT}자기야말로 공포와 폭력의 원인제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적반하장 격으로 엉뚱한 사람들에게 영화 속 니콜 키드만처럼 몽니를 부리는 불청객 하나가 창고에서 썩고 있는 고물 전투기 판매를 위해 우리나라를 손수 찾아오신다고 한다. 얼마 전 목에 가시가, 아니 과자가 걸려 귀신이 될 뻔한 아슬아슬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다. 만약 그 고비로부터 헤어나지 못했다면 귀신이 된 이후에도 자기의 정해진 운명을 모르고 평생 어두침침한 백악관 복도를 배회했으리라. 그럼 아마 백악관에서는 밤새 유령이 꼭꼭 쳐놓은 커튼을 떼어내느라 매일매일 부산을 떨었겠지.

번연히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동족을 The Others로 멋대로 재단하고 규정해 두려워하게끔 충동질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다. 특히 힘깨나 쓰고 지위깨나 누리며 먹고 살만한 사람들일수록 이러한 경향이 농후하다. 이 사람들이 정권을 잡아 민족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위치에 다시 올라선다면 국민 전체가 그레이스에게 쫓겨난 불쌍한 집주인처럼 금수강산 곳곳에 "For Sale"이란 말뚝을 박아놓고 단체로 이민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미국이 더 무서운가? 북한이 더 무서운가?
김정일과 부시 중에 누가 더 괴물인가?
"디 아더스"의 결말을 알려준 Cinema Jockey, 오늘만큼은 결론을 읽는 분들께 맡기련다.

기사입력: 2002/02/18 [19:22]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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