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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를 여는 주체는 누구인가?
[책동네] 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조건(2008, 시대의창)
 
황진태   기사입력  2008/03/16 [14:17]
▲<새로운사회를여는상상력>(2006)     © 시대의창
2년 전 진보적 싱크탱크를 자임하고 출범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하 새사연)은 첫 단행본 <새로운사회를여는상상력>(2006, 시대의창)을 통해서 새로운 사회의 밑그림을 제시한 바 있다. 이번에 출간한 <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조건>(2008, 시대의창)에서는 밑그림의 색을 채우는 주체가 누구인가와 그 실현을 모색하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국내 학계에서 대안정치경제모델연구가 근자에 들어서 상당히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서유럽, 남미 등을 통해서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을 검토하고, 한국형 대안경제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구조 안에 형성되는 개인(agent)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왔으며, 진보진영에서도 ‘민중’으로 환원할 뿐 민중 내부의 다양한 빛깔을 도출하는데는 소홀했었다.
 
이번 <희망의 조건>은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체들이 어떻게 해야만 주체로서 살기 좋은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가를 실증적 데이터에 기반한 분석과 더불어 실천 가능한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업이다.

신자유주의, 주주자본주의의 한국사회

본서의 가장 큰 문제의식은 한국사회의 경제구조의 변환에 있다. 속칭 87년 체제로 불리는 형식적 민주화의 위기가 아니라 국제통화기금조치를 받고서 신자유주의가 이식된 97년 체제의 위기가 문제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침투에 의한 주주자본주의의 실현은 본서의 모든 주체들을 꿰뚫는 주제다. 요컨대 “미국 중심의 거대 금융자본의 주도 아래, 소수화되고 비대해진 재벌기업군, 민영화된 공기업, 금융기업 그룹이 최신의 주주자본주의를 이끌고 있는 것이 한국 경제의 새로운 모습”(381쪽)인 것이다. 이는 혹자의 상상된 50:50의 진보 대 보수의 싸움이 아니라 20:80 혹은 10:90의 양극화 구도에서 10을 위해 희생하는 나머지 90의 주체들을 분석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반反신자유주의 구도 아래에서 현재의 형해화된 민중의 결집이 필요하고, 본서는 민중 안에 노동자, 농민, 대학생, 자영업인들을 분석함으로써, 주체로서의 나아갈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하고자 했다. 

노동자, 농민, 대학생, 자영업자를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서

노동자 분석에서 내가 인상 깊었던 부분은 기존의 제조업 위주 노동자 문제, 비정규직에 대한 분석에서 한층 더 나아가 첨단산업 노동자(가령 IT종사자)와 금융산업 노동자를 끌어안는 적극적인 주체화의 시도다.

기존의 선입견은 첨단산업 노동자에 대해서 고소득, 쾌적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화이트 컬러로만 생각하고, ‘노동자’로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한국사회의 지식기반경제로의 전환에서 이들 첨단산업 노동자가 갖고 있는 중요성을 감안하면 결코 노동자 이외의 범주로 두어서는 곤란하다고 보고 있다. “이들의 주간 평균 노동시간은 약 58시간이며 60시간 노동하는 비율도 43퍼센트나 된다. 심지어 80시간 이상 초장시간 노동하는 비율도 7.6퍼센트에 달했다. IT강국의 첨단 노동자란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동시간이다. 이는 임금 노동자 평균 50시간을 넘어섬은 물론, 자영업인 노동시간 59시간과 맞먹는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외 근무수당을 받는 경우가 8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204쪽)면서 노동강도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노동강도에도 불구하고 노조조직률은 지극히 저조한 상황은 거시적으로 한국의 산업구조가 지식기반경제로 전환과 맞물린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금융산업 노동자의 경우는 첨단산업 노동자에 비해 주체화의 시도에 대해서 사회적 여론이 곱지는 않다. 하지만 최근 은행의 비정규직의 증가, 남아있는 정규직의 노동강도 증대 등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의 선두에 97년 체제 이후 금융기업 그룹의 강세를 볼 때 이에 대한 브레이크로서 “이들(금융산업 노동자)이 가지고 있는 산업에서의 영향력은 금융 주주자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노동자의 이익이 되는 방향에서 사용되어야 할 것”(209쪽)이라는 점에서 이들을 주체로서의 포섭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농업의 경우 지속 가능한 국민농업으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국민농업이란 “국민 모두가 이해당사자가 되어 함께 책임지는 농업”(264쪽)을 일컫는다. 요컨대 농업이 국민과 무관한 산업이 아니라는 것은 최근 언론을 통해서 제기되고 있는 아토피, GMO식품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국민농업에서 제기하는 환경친화적 농업으로의 전환, 식량의 안정적 공급, 전국민적인 먹을거리 공동체 형성, 남북의 상호보완적인 농업 공동체 형성은 단순히 GN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불과 3퍼센트에 불과하다며 농업의 중요성을 폄하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농민운동의 전방위적인 네트워크화를 통한 신자유주의적 농업방식에 대한 대응이 필요한 것이다.   

다음으로, 대학생의 경우 일련의 비운동권의 학생회 구성, 대학생들의 대선에서의 보수정당 후보 지지 등에서 드러나는 운동의 죽음, 보수화 현상을 두고서 진보진영에서 대학생들의 ‘운동의 재귀’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새사연은 현재의 대학생들의 경제적 상황은 치솟는 등록금으로 인하여 과거 80년대 운동권보다 훨씬 악화되었다는 점, 대학 자체의 계층화, 양극화로 인한 대학 졸업 이후 사회진출에서의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2000년대의 대학생들은 1980년대 혁명가만큼이나 바쁘다”(313쪽)는 것을 인정하면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전공 선택과 등록금,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는 대학생들은 더 이상 ‘민중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특권적 주력군이 아니다. 대학생 ‘너머’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온 ‘민중’을 위해 복무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요구에 대한 해명과 해결이 필요하다”(316쪽)며 프랑스의 최초고용계약법에 대한 프랑스 대학생들의 반대투쟁에서 노동자들과의 연대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교육경영에서의 신자유주의의 이식에 대한 등록금 투쟁 등의 시작으로 다른 조직과의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끝으로 자영업자의 분석이다. 앞서 첨단산업, 금융산업 노동자만큼이나 민중의 범주에 넣기가 곤란했던 부분이 자영업자다. 왜나면 자영업은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만, 직접 노동을 하기 때문에 애매한 중산층으로 싸잡아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00만 명의 자영업자들을 누락시키고서 새로운 사회의 주체를 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새사연의 연구에 따르면 자영업에서 5인 미만의 고용업체가 전체의 88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영세하며, 월평균 소득이 중산층으로 간주하는 214만원에도 못 미치는 자영업자가 490만 명에 다다르고, 자영업자 내부의 소득불평등이 임금 노동자보다 심각하고, 자영업자가 빈곤층으로 추락할 확률이 임금노동자보다 더 높다는 점에서 단순히 임금 노동자들은 ‘유리지갑’이라면서 자영업자를 비판하기에는 “자영업자의 지갑은 투명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결코 두껍다고 할 수 없다”(349쪽)고 본다. 서비스업의 증대는 선진국 사회로의 진입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생산자, 사회 서비스의 저조함과 대조되는 유통, 개인 서비스의 증대는 결코 선진국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새사연은 이러한 비정상적인 자영업의 증대가 신자유주의에 의한 노동의 유연화 전략에 떠밀려 나온 이들의 ‘비자발적인 선택’임을 지적하면서 자영업 특유의 지역기반을 살려서 지역주민들의 연대를 끌어내어 다른 주체들과의 도시연대를 구성을 주창한다.

상위 10%만을 위한 시장국가에서 하위 90%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짧은 글에 400여 페이지의 분량을 압축한다는 자체가 무모할지도 모른다. 한 가지 염려되는 점은 노동자의 범주에 첨단산업, 금융산업 노동자를 주체화하는 것이나 불투명 지갑인 자영업자의 주체화에 대해서 기존의 선입견대로 독자들이 오해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본서는 신자유주의, 주주자본주의가 한국사회 전영역에 확산된 10:90의 양극화 사회로의 이행에서 어떻게 이를 저지할 주체를 형성하는 가에 대한 고찰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해서 새사연은 실증적 데이터와 질적인 연대의 고민과 토론을 담아낸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의도를 서평에서 담아내지 못하고, 개량주의적인 냉소로 반응한다면 온전히 필자의 책임이다.

책 뒤표지에는 민주노총 사무금융, 철도노조, 전국여성농민총연합회, 벤처기업인, 서점주인, IT노동자, 대학생들의 한줄 서평이 담겨졌다. 이들이 한결처럼 말하는 것은 본서의 문제의식인 신자유주의, 주주자본주의 하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조직과 구성원들이 연대를 해서 10:90의 사회에서 10이 아닌 90을 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다.
                  
“상위 10%만을 위한 시장국가에서 하위 90%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본서의 부제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막연했던 신자유주의로부터의 수동적인 자세에서 조금 더 능동적인 사고를 끌어내어 다른 곳에 있는 노동자를 농민을 대학생을 그리고 자영업자들을 생각해보았다.

대안정치경제모델의 고민이 결코 숭례문의 소실보다 덜 중요한 사안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보수언론은 제쳐두더라도 합리적인 공중파 방송사에서 숭례문 소실은 똑같은 주제로 부리나케 토론회를 개최했지만 대안정치경제모델을 두고서 토론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2년 전 <새로운사회를여는상상력>이 발간되었을 때의 문제의식조차 언론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체에 관한 진전된 논의를 하는 것이 우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하위 90%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독자들의 일독과 나아가 주체들의 연대를 통해서 도리어 새로운 사회를 열 주체들에 의한 공론화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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