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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열증' 대한민국, 대선 이후의 길
[비나리의 초록공명] 이제는 어깨에 힘을 빼고 담담하게 현실을 볼 때
 
우석훈   기사입력  2007/12/06 [11:13]
1. 아드레날린 과다분비와 어깨에 힘 빼기
 
아드레날린이 과다하게 분비되는 순간에 대한 비유로 하석주의 백태클을 종종 사용하기는 한다. 골을 넣었을 때의 그의 황홀했던 표정과 레드 카드를 받았을 때의 그의 황망한 표정이 오버랩되면서,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 현상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물론 의학적으로 그 설명이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대선이 가까와지면서 많은 사람들과 지도자에게서도 이 아드레날린 과다분비 현상이 관찰되는 것 같다. 어딘가 나사가 살짝 빠진 모습들...
 
평소에는 잘 흥분하지 않던 사람들도 이 기간 중에는 때때로 과도하게 흥분하고, 자신들의 길었던 생각을 아주 짧게, "나, 이거 좋아" 혹은 "나, 이거 싫어", 한 문단도 되지 않은 정보값으로 요약하고는 한다.
 
이 와중에도 많은 장차관들과 공기업 사장 같은 사람들이 내년 3월 이후의 일자리에서 고민하는 흔적들이 역력하다. 어떤 사람은 길었던 공직 생활을 정리해야 하는 순간이고, 어떤 사람은 또 다른 도약을 위해서 택도 없는 몽상을 꾸기도 한다.
 
2.

확실히 검찰 수뇌부는, 최근 아드레날린 과다분비 같아 보인다. 발표문을 낭독하는 그 결연한 표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비장미를 느끼기도 했다고 하는데, 나는 좀 웃겼다. 지나치게 비장하며 결연한 표정은, 너무 비장해서 차라리 웃겼다. 아니, 이게 사람의 표정이야?
 
3.

지난 5년 동안, 한국 사회는 확실히 정신분열증적인 요소가 많았던 것 같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단어와 이라크 파병에서 황우석 그리고 한미 FTA로 화려한 결말을 보았던 이 '다중적 꼭짓점'은, 그 어느 시기보다 정신분열증적 요소가 강했다.
 
외견, 이런 상황들의 분석이 간단해 보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미신들을 지지하고 열광하는 작동 메카니즘들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었을 것 같고, "왜?"라는 질문은, 때때로 깊은 미궁 같은 것이기도 해보인다.
 
하여간, 대선이 끝나면 어떤 식으로든 이런 분열증적 요소는 보다 간단해질 것 같기는 하다. 물론 간단하기는 하지만, '욕망'과 '좌절'이라는 두 가지 요소 사이에 에너지들이 늘어서지 않을까 싶다.
 
욕망을 드디어 달성했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남은 것은 좌절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확실히 분열증적인 요소는 줄어들게 될 것이다. 물론 흑백이 명확한 흑백 사회가 꼭 분열증적인 사회보다 좋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4.

황우석에서 디워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에, 딜레마가 하나 있다. 여기에 마치 무슨 기획자가 있고, 음모가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아니고 그야말로 군중심리학에서 말하듯이, 대중의 욕망이 움직이는 공간인데, 이런 욕망은, 좌절된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또 "그거 아니다"라고 알게 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다른 곳에서 온, 전혀 다른 공간의 주체가 아니라, 이런 사람들을 포함해서 국민경제 혹은 한국 사회, 그런 게 구성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약간 낯선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웃"인 셈이다.
 
고전적인 표현이라면, '북한 괴뢰' 혹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라고 보편적인 내부적 함의를 갖는 지칭법이 있다. 이런 타자형 지칭법과 이런 우리 내부의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은, 아마 많이 달라야 할 것 같다.
 
이명박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와 유사한 문제 의식으로 분석될 수는 있지만, 이건 분석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혁명의 틀이라면, "없앤다" 혹은 "권력을 뺐는다"고 쉬운 논리적 해결법을 찾을 수 있지만, 선거와 민주주의라는 틀에서 움직이는 공간 혹은 시장의 공간에서는, 그런 건 아니다.
 
덕분에 세상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평화롭지만, 논리적으로는 훨씬 어려운 것 같다.
 
5.

하여간 이런 골 아픈 얘기 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대선이 끝나고 6개월에서 1년 동안, 이 '좌절'의 에너지가 갈 데가 없기 때문에, 사이비 종교와 역시 사이비 종교의 속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사회과학으로 볼 때에는, 공간 하나가 열릴지도 모르겠다는...
 
뭐,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도들이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하여간 지난 5년과는 달리, 사람들이 사회과학에 대해서 집단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는 가느다란 공간이 열리지 않을까와 같은 생각을 좀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나같은 초짜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아니지만, 좀 진지하고 깊숙하게 "지금 우리" 혹은 "앞으로 우리는", 이런 얘기들을 고개가 끄덕끄덕거려지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사회과학에 대해서, 공간이 열릴 것 같기는 하다.
 
만약 이 시기에 집단적으로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IMF 이후 10년만에 처음으로 작은 길 하나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보기는 한다. 물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지난 3년 동안, 시대가 어려울 때 등장했던 참요와 참서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self 상담서에 가까운 처세술책들과 자기진단형 모델들이 세상을 덮었는데, 그래도 이 허황된 공간을 뚫고 사회과학이 일종의 시대진단과 집단 행동 프로그램으로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전후 패망 이후 45년에서 50년 사이에 이런 공간이 열렸던 적이 있었다고 들었다.
 
6.

좀 불행한 것은, 나나 내 주변의 사회과학 전공자들 중에서 그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는 뭔가를 준비하는 사람이나 그룹은 없고, 또 그 정도 수준에 도달한 품격 있는 연구자도 없다. 그래서 정작 그 시기가 되어도 아무 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언제나 다가 아니다. 내 눈에 안 보인다고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흐름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데, 있으면 좋기는 하겠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비자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다음 흐름이 나타났을 때, 그들이 움직임이  조금 더 부드러울 수 있도록 조금 희생할 마음이 있기는 하다.
 
흐름상 가장 아름답기는,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진짜 소장파 저자들이 대거 등장해서 내년 여름의 공간을 채우기 시작하면, 정말 아름다운 새로운 길이 열린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상 많은 대가들이, 대개 그 나이에 논문이나 문제작을 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고, 결국 대가가 된다.
 
우리나라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확률은 25%, 한국에 사회과학 르네상스가 도래할 길이 하나 열릴까?
 
조금씩 준비하면서, 그 길이 열리기를 희망해본다.
 
많은 사람들이, 내년에는 어깨에 힘을 빼고 담담하게 현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정말로 기적같은 길 하나를 열어낼지도 모른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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