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워>를 둘러 싼 논란을 올바로 평가하는 일은 중요하다. 사람들이 서로 의견이 엇갈려 논쟁을 벌이고 있다면 뭐 문제될 것이 없다.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상대 의견을 존중해야지 싸워서 되겠는가 이런 식의 질책으로 사건이 마무리되니까. <디워>를 둘러싼 논란은 그런 종류의 논란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디워>는 황우석의 논문 조작처럼 영화 조작 사기극으로 막을 내리게 예정되어 있다. 참으로 흥미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문화예술계에서 사기극을 허용하기 위해 논란을 벌이는 사회가 있다면 벌써 그 자체가 그 사회의 병리성을 폭로하고 있다 할 것이다. <디워>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찬반 논란은 보통의 논란과 상당히 다른 차원의 것이란 것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이것이 내 관심사다. 지식인들은 아직도 중요한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디워> 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한국 사회는 인맥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는 식이다.
한국 사회는 <디워>를 SF나 환타지로 오해하고 있다. 그로 인해 <디워>를 둘러싼 논란이 애매모호해 보인다. <디워> 마케팅이 '한국 SF'라고 선전해서 별 의심 안하고 모두들 믿어버렸다. <디워> 미국 판매용 예고편에는 '한국 SF의 시작'이라고 선전하고 있단다. <디워>는 쥬라기 공원처럼 즐기기 위한 단순한 영화도 못된다. 눈요기용 영화는 스릴이 있어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면서 최소한의 공포, 괴기스러움 정도는 느끼게 해 줘야 한다.
|
▲<디워> 관람을 선택한 이유를 분석해 보면 <디워>에 대한 평가를 알 수 있다. © 맥스무비 |
<디워>는 공상과학 영화의 특징이 전혀 없으므로 SF영화 조건 속에 포함이 못된다. SF영화는 스토리가 과학적으로 치밀하고 빈틈이 없다. SF의 핵심은 스토리이다. <디워>에는 과학적 논리는 커녕 국어 논리마저 없다. 그렇다면 환타지에는 속할까? 환타지가 되려면 환상의 세계로 관객이 감정몰입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는 있어야 한다. 그 점에서 <디워>는 환타지도 아니다. 그 이유를 다음의 한 예에서 살펴보자.
영화 초반에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이무기가 소녀의 몸에 감춰진 여의주를 얻기 위기 마을을 공격한다. 대대적인 어마어마한 병력을 갖추고 방어력이 전혀 없어 보이는 민간인 마을을 쳐부순다. 그러다가 그 마을 안에 소녀가 죽으면 이무기는 여의주를 얻지 못하게 되어 있다. 나중에 소녀가 자신을 지켜주는 청년과 벼랑에서 떨어져 자살함으로써 이무기는 여의주를 얻는데 실패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이런 영화적 배경을 감안할 때, 이무기는 대대적인 병력을 자랑할 정도로 파워가 막강한데 소녀 한 명 달랑 납치해서 데리고 가면 그뿐인 것을 소녀가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마을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 후로 계속되는 장면마다 영화는 ‘뜬금없음’이라는 생각을 연이어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원래 환타지 영화는 관객을 몰입시켜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 수가 없다. 그래서 환타지인 것이다.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환타지는 아니다.
<디워>라는 영화는 장면 장면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다는 감성을 관객들에게 심어주어 환타지 요소마저 스스로 내던져버렸다. 뜬금없고 앞뒤 안 맞는 내용은 쉴새없이 이어진다. 분명히 인간의 감성상 주인공이 위기에 처해 있어 관객이 스릴을 느껴야 하는 장면에서도 주인공들은 컴퓨터그래픽과 현실 차이만큼이나 항상 안전하다. 그래서 <디워>는 눈요기용 영화도 절대 못된다. 눈요기용 즐기기 위한 영화는 최소한 스릴을 느낄 수 있어야 명함을 내밀 수가 있다.
환타지 스토리는 독자가 환타지 세계를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지 이 스토리가 말이 되나를 놓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 법이다. <디워>는 ‘이게 도대체 말이 되나’ 이런 생각이 들도록 관객을 유도한다. 관객의 머리 속에 딴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영화는 영화로서 탄생되지 못하는 법이다. <디워>는 그런 점에서 탄생될 수가 없는 영화를 한국 사회에서 대대적으로 정상적인 영화인 것마냥 홍보하고 있어 사기극이라고 볼 수밖에는 없다. 심영래가 한 말 ‘못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해서 못하는 것이다’ 라는 유명한 문구는 영화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던 셈. ‘사기를 못쳐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사기를 안 쳐서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입해 놓고 보니 심영래 말도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긴 하다.
<디워>가 환타지가 못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렇다. 영화는 쉴 새 없이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이 영화는 정신병 환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라고 변명해댄다. 대사가 영화와 따로 논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콤플렉스를 가지고 대사를 통해 자기변명을 해대는 영화는 세상에 처음 봤다. 또 변명은 영화 끝나고 자막에도 올라간다. 온통 변명투성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이 ‘이 영화는 개연성이 없고 전혀 말도 안 되고 몰입할 수가 없게 만드는 횡설수설이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관객에게 영화를 보게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관객들에게 ‘정말 유치하다 이거 어린애 장난하는 거냐 뭐냐 돈이 아깝다’ 라는 생각을 유도하는 것이다. 사기를 칠려면 영화 속에서 관객을 상대로 쳐야지 '예술은 사기이다' 이 정도 선에서 용서를 받는다. 왜 영화 밖에서 마켓팅으로 사기를 치나?
한국에서 <디워>가 성공적이라는 언론의 평가도 진실이 아니다. 그 점에서 <디워>는 다른 영화와 다르다. <디워> 투자 자본이 일반 한국 영화들과 다르게 700억원 정도라고 하는데 손익분기점을 넘으려면 천오백만 관객 이상을 동원해야 한다고들 한다. 현재 뉴스 보도에 의하면 <디워>가 4백50억원 정도 판매실적을 내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한국에서 <디워>는 이미 망한 것이다. 손익분기점을 아직 넘지 못한 영화를 미리 성공한 영화라고 예단하는 한국 언론인들은 <디워>의 투자가들인지? 성공했다고 해야 대중들이 '사회적 증거의 법칙'에 따라 속기 때문이다. 왜 이들은 경제 위기에 허덕이는 대중의 호주머니를 그런 식으로 노리는 사기적 마케팅에 적극 동참하고 있을까? 그것이 우리 대중들이 힘을 발휘해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이다. 언론은 진실추구의 철학을 견지해야 한다.
첫째 <디워> 마케팅에 사람들이 속았던 이유를 들면, <디워>는 방학을 맞아 미성년들이 볼 수 있는 영화가 그것뿐이라는 틈새시장을 노렸었다는 점(방학이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다, 또 슈렉같은 영화와 함께 개봉했다면 벌써 문 닫았다)이다. 아이들 대동한 가족단위 관객이 가장 많은 방학기간을 이용한 것이다.
둘째, 언론과 인터넷이 진실을 외면하고 대대적인 광고를 해 치알디니가 분석했던 ‘사회적 증거의 법칙’에 따랐다는 점. 한국사회는 이 점에 아주 약하다.
[참고: ‘사회적 증거의 법칙’이란 베스트셀러를 사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하는 현상. 남 눈치 잘 보는 한국인들은 특히 이 점에 취약하다. / 참고서적 김용규의 <설득의 논리학>] 셋째 마초 자본의 불순한 개입이 있었다는 점, <디워>는 마초영화이다. 한국에서 일단 마초영화는 성공하기 쉽다. <디워>의 여의주가 상징하는 것은 여성의 난자이다. 용은 황우석을 상징하는 것이고. 여성계는 <디워>에 대한 따끔한 비판을 가해야 할 것이다. 여성 몸 먹고 용되자는 것이 <디워> 영화의 세계관이다. 마초범죄 합리화하는 세계관을 가진 영화가 성공할 수 있을까? 황우석 팬들이 집단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으면서 정신과에서 애국주의로 뭉쳐 <디워>를 옹호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디워>가 볼만한 영화였다는 감상평을 하는 사람은 황우석 논문사기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이다. 진짜 순수한 감상이 아니라 황우석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 감상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 일부 지식인들은 인터넷의 황우석 옹호 집단을 대중으로 등치시켜 놓고는 흐뭇해한다. 사기꾼은 사기꾼끼리 통하는 법이니까.
광기를 가진 대중은 침묵하는 다수 대중과 거리가 있다. 광기 집단이 <디워> 비판을 못하게 하면 지식인이라면 한번쯤 의심해 봤어야 했다. 이들이 과연 대중을 대표할까? 다수 대중은 광기 집단의 '그래도 CG는 괜찮았어'라는 사기극에 속았던 것이다.
넷째, 한국의 애국주의 코드는 파블로프의 개다. 애국심이 조건반사로 작용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최다 관객을 동원했다는 순이익을 낸 영화들은 대중의 조건반사신경, 즉 애국주의를 이용했다. 대중의 동물적인 ‘고정행동유형’을 주 타켓으로 삼았던 것. 정치인들도 애국심의 개에게 먹이를 주는 방식으로 권력을 쟁취해 왔었다. 그러자 <디워>는 뜬금없이 끝에 아리랑을 삽입해 국적불문의 영어로 된 영화에 애국주의를 입혔다. 이건 분명 사기이지. 내용에 애국주의가 없는데 아리랑만 가지고. <디워>는 내용상 한국 영화도 아니고 동양의 신화도 아니다.
이상의 여러가지 복합적 이유들 때문에 4백50억원 정도의 판매실적을 올렸다고 본다. 물론 자본의 스크린 독점도 한 몫했다. 이 영화 때문에 좋은 영화들이 움츠러들고 대한민국 영화계가 피를 봤다. 문화예술계에 대한 타격은 그보다 크다. 앞으로 예술인들은, 특히 영화감독들은 좋은 작품 보다는 사기적인 마켓팅을 잘해야 한다는 질 나쁜 관행을 남기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러한 나쁜 관행을 세우지 않기 위해 대중이 앞장서서 사회 질서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황우석의 논문 조작만큼이나 영화팬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자본의 속셈은 뭘까? 자본의 목적은 돈을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디워>는 실패가 뻔한 영화를 마켓팅마저 대대적으로 하고 있으니 약간 의아하다. 한국에서 이미 실패한 영화를 해외에서 200억원 뿌리면서 마케팅을 하고 있다고 한다. 파블로프의 개 사료인 애국주의 코드까지 동원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도 성공 못한 영화를 미국에서 1500개 극장 개봉을 잡아 놓았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투자로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자본이 열을 올리는 이유는 뭘까? 자본의 생리상 돈이 목적이라면 그 정도 돈을 쏟아 부으면 외국에서 간단히 성공이 보장되는 한국 영화가 수도 없이 많은데도..... <디워>처럼 마켓팅에 많이 투자하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디워>의 실패가 뻔하다는 평은 한국 대중의 감성을 이미 체질적으로 알고 있는 영화평론가들이 대중들의 입맛을 대표하여 이미 발표해 놓았고 자본의 주체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디워>는 심형래에게 영화감독으로서의 사망선고를 내린 거라고.
<디워>라는 영화를 통해 자본이 노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는 점! 그게 뭘까? 한국 대중들에게 사기를 치고 그 사기극이 먹히나 안 먹히나 알고 싶다는 것일까? 만약 사기극이 먹히면 앞으로도 이런 식의 권력과 자본의 결탁은 계속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디워>를 계기로 해서 한국 대중들의 대대적인 사회정화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디워>가 대선과 연결되는 코드는 애국심이라는 ‘고정행동유형’이다. 애국심은 현재 초등학생들도 입학하자마자 투입받는 파블로프의 개의 사료이다. 파블로프 개의 사료는 어떤 식으로든 사회의 각성이 없다면 통일이 된 후에도 여전히 한국인들의 사료로 사용될 것이다. 고로 현재 투표권을 가진 20대와 386은 다르다는 언론들은 증거를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디워>논란이 20대와 386의 대립이라고 언급했다. 애국주의가 아니란다. 올바르고 공정한 대선을 위해 언론의 증거조작의 실태를 사회에 낱낱이 고발할 필요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