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차인표, 김혜수, 신해철, 문소리, 김미화 등 적지 않은 연예인들이 미군범죄에서부터 환경, 노인문제, 아동학대 문제, FTA문제, 이라크 파병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데, 대중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연예인들이 인권이나 환경 문제 등 사회의 제반 여러 모순점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튼튼해지고 있는 반증이라고 본다.
비록 구설수에 오르고 있기는 하지만, 차인표가 자신의 미니 홈피에 나름의 생각을 피력한 행위는 그 자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하다. “각하, 힘내십시오.”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이덕화나 “박 전 대표가 제2의 선덕여왕이 되셨으면 좋겠다.”라는 표현으로 실소를 자아내게 했던 연예인에 비하면 얼마나 건강한 행동인가?
필자가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다고 해서 차인표의 발언에 면죄부를 주고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이미 알아챘으리라 믿는다. 이제 연예인의 목소리가 정치가의 변설에 버금가는 영향력이 있는 시대가 되었으므로 그 주장에 대한 비판도 감수해야만 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우선 차인표가 올린 글 전문을 소개하겠다.
악어들이 득실거리는 어느 강가에 “위험”이라는 푯말이 서 있습니다. 강을 건너던 작은 배가 뒤집혀 아이들이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그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 무리의 어른들이 강으로 뛰어 듭니다. 아이들을 한 명, 두 명 구하던 그 어른들은 이내 악어의 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기 시작합니다. 강가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할까요? 아니면, “위험”이라는 푯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네 의지로 갔으니 알아서 해라" 할까요? 혹은 "지금 악어에게 물리고 있는 사람이 나와 같은 종교인가, 아닌가"를 분석할까요? 일면식도 없는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을 돕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던 착한 사람들이 악인들의 손에 붙잡혀 생명이 위태로운 지금 그들을 바라보면서, "유서 쓰고 갔으니, 조용히 죽어라", "내가 낸 세금으로 몸값 지불하지 말아라" 라고 말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입니다.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들을 돕는 게 밉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질투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돕습니까? 나를 먼저 도와야만 착한 사람들입니까? 내가 먼저 살고, 그 다음 내 부모랑 자식들이 잘 살고, 내 친구들이랑 주변의 내 편들이 다 잘 살게 된 다음에, 그래도 여력이 되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이기심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긍휼한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 스물세명의 소중한 분들에 대한 모함이요, 매도이고, 평가할 가치가 없는 나쁜 생각입니다. 크리스챤을 욕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은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지,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챤 중에서도, 돌아가신 배형규 목사님과 아직 억류되어 있는 스물두분은 선하고, 훌륭한 분들입니다. 이 분들은 존재함으로써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보석같은 사람들입니다. 큰 교회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주위의 크리스챤 때문에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싫고, 이해 할 수 없는 집단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을 보고 양치기를 탓하지 말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순결하고 깨끗해야 할 양이 더럽고, 지저분합니까? 새하얄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냄새나고, 털에는 벼룩이 있습니까? 순할 줄 알았는데, 손을 내미니 그 손을 물어 버립니까? 그 더럽고 사납고 무례한 양을 거둬들여 보호하고 사랑하고 인도하는 양치기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양들을 그토록 사랑하게 만들었는지 말입니다. 양치기가 품은 양들은 천천히 바뀌어 나갈 것입니다. 지금은 우둔하고, 못나고, 기억력이 없어서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또 저질러 양치기를 슬프게 만들지 모르나, 어제 보다는 오늘, 오늘 보다는 내일... 그렇게 하루에 조금씩 양들은 변해 갑니다. 양은 결국 양치기의 모습을 닮아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순교하신 배형규 목사님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듯 말입니다. “인질들의 무사귀환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하는 차인표의 주장은 옳다. "유서 쓰고 갔으니, 조용히 죽어라", "내가 낸 세금으로 몸값 지불하지 말아라" 라는 네티즌의 악플에 항의하는 것도 인정한다.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세상을 향해 긍휼한 마음을 품어야한다는 말도 반박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차인표가 간과하고 있는 게 몇 가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아프간은 악어가 아니고 탈레반도 모두 악인들이 아니다.
메타포의 한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차인표의 의식에는 탈레반은 모두 악인이며 아프간은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합한 지역이라는 사고가 팽배해 있는 듯하다. 한편 그들에게 원조를 베푸는 나라 즉 미국이나 우리나라는 정의의 사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듯싶다.
그러나 아프간이 왜 이렇게 비극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춰지고 있는 지 그 이유에 대해 조금쯤은 생각해 보길 권한다. 1973년 이래 공화제, 내전, 소련 침공, 또 한 번의 내전, 그리고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 치하 5년을 거쳐 2001년 9.11 미국 대폭발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는 다시금 세계의 총부리가 겨눠지게 되었는데, 빈곤과 파괴의 악순환 그 배후에 과연 누가 자리 잡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 봤으면 한다.
둘째, 아프간 국민들은 아이들이 아니며 23명의 한국인들도 어른이 아니다.
아프간 국민들이 위험에 처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에 피랍된 23명의 한국인들이 그들을 구하기 위해 갔다고 주장함은 아무래도 난센스임에 틀림없다. 차인표의 이러한 사고관 근저에는 이슬람을 믿는 자체가 위험한 일이며 기독교로 개종해야만 안전해진다는 전형적인 개신교 선민주의의 발로가 아닌가 한다.
박은조 목사의 말에 따르면, 아프간은 샘물교회가 파송한 장기 사역자들이 7명이나 섬기고 있는 땅이라고 하는데, 우리 솔직히 얘기해 보자. 과연 이번에 피랍된 샘물교회 소속 신도들이 아프간 국민들을 구하러 갔는가? 아니면 샘물교회와 한민족복지재단 등의 활약상을 견학하러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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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교회의 이번 아프간 파송이 선교활동이라는 누리꾼들의 지적과 이를 보도한 MBC 뉴스 ©MBC 화면 캡춰 |
사실 아프간 국민들을 개신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그렇다면 결론은 자명하다. 이렇게 위험한 지역에 우리들은 목숨을 걸고 선교를 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영웅적인 선교 행적을 잘 확인하시고, 국내에 돌아가면 보다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지원해 주시길 바란다, 바로 이것이 샘물교회와 한민족복지재단의 기획의도가 아니겠는가? 차인표는 피랍인들의 행위를 영웅적인 선교 행위로 보는 듯한데, 아무래도 그대는 오해를 하고 있다.
셋째, 고 배형규 목사와 22인의 피랍인들은 과연 선하고 훌륭한 사람들인가? 차인표가 말하는 선함과 훌륭함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프간 단기선교 자체가 선하고 훌륭한 행위라는 뜻인 모양인데 아무래도 설득력이 약한 것 같지 않은가? 아무튼 차인표의 논리대로라면, 죽어가는 아프간 사람들을 구하러 갔던 선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오히려 한 명은 죽음을 당하고 나머지는 심각한 위험에 처한 셈이 되겠는데, 그들을 구하기 위해 더 위험한 악어들을 풀어져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탈레반을 악어로 비유한 차인표의 비유대로라면, 더욱 거대한 악어들을 우리에서 풀어주어야만 구조대원인 어른(피랍인)들이 살아나게 된다. 자, 그러면 위험지역이 있던 아이들, 즉 아프간 국민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아이들을 구하러간 어른들 때문에 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이르게 되지 않았는가? 23명의 피랍인들을 보석 같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무래도 성급한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넷째, 양치기의 정체를 아는가? 차인표도 기독교의 비행과 비리에 대해선 일부나마 알고 있는 듯하다. 대형 교회의 문제점 그리고 기독인들의 파렴치함에 대해 싫고, 이해 할 수 없는 집단으로 보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혹은 기독교 자체는 어떠한 잘못도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비유가 틀렸다.
더럽고 사납고 무례하며 게다가 우둔하고, 못나고, 기억력이 없어서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양이지만, 양들은 목자들이 가르치지 않아도 목마르면 물먹고 배고프면 풀을 뜯을 줄 이미 알고 있다.
목자의 임무는 들짐승들로 부터 양떼를 보호하고, 양들이 울타리 바깥을 벗어나지 않게 규제하는 것이지만 양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목자 그리고 목자 주인의 식량과 거래품이 된다는 운명이다. 양들을 일반 교인라고 하고 양치기를 종교사업자라고 대입하면 이해되리라 믿는다. 차인표는 양치기의 정체에 대해 곰곰이 다시금 생각해보라.
다섯째, 배 목사의 죽음은 순교가 아니다.
필자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배목사의 억울한 죽음을 순교로 포장하여 개신교의 확장 사업에 이용하고자하는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음모이다.
"지금은 묵묵히 비판을 감내할 때다. 당분간 인터넷에 접속하지 말라" "반기독교 세력이 인터넷 상에 조직적으로 비방 글을 올리고 있다" "허위사실에 기반한 비난이라고 할지라도 지금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정할 여력도 정황도 아니라"라고 교인들에게 설교한 박은조 목사의 진정한 속셈은 과연 무엇일까?
김선일의 죽음을 포장하여 온누리 교회의 홍보에 적극 활용한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배목사의 죽음은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개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아프간의 현재 상황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급한 상태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 교인들을 내보냈다면 박은조 목사의 직무유기가 될 터이요, 알고도 보냈다면 박 목사 및 개신교 지도자들의 선교전략에 이용당한 셈이 된다.
배 목사를 비롯한 이번에 피랍된 인질들이 과연 목숨을 버릴 각오로 그곳에 갔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배목사의 죽음은 순교로 포장되어 종교장사꾼들에게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 왜 배 목사가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고 책임자에겐 철저히 책임을 추궁해야만 한다. 박은조 목사의 설교 내용을 보라. 그는 지금도 전혀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소나기를 잠깐 피해야 하겠다는 몰염치뿐인 것 같다. 이래선 배 목사의 죽음이 정말 개죽음이 되고 만다. 그래도 22인의 이웃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명제에는 동의한다.
"피랍자부터 살리고 보자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적극적으로 살리되 다만 피랍자들이 입국할 때는 영웅처럼 화려하게 들어오지 말고 고개 숙이고 들어오길 바란다" “주류 언론들은 지금껏 인터넷에서 10명 중 1명만 시끄럽게 떠들어도 그 자극성을 이용해 기사화하더니 지금은 많은 네티즌들이 같은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데 정식 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이번일이 아무래도 기독교와 관련 있기 때문에 기존 언론이 눈치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며 언론의 보도태도를 비판한 가수 신해철의 발언이 너무나 신선하게 들렸음을 마지막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