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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군인의 대모' 황마마, 의문사 유가족 만난다
'대만 군인권 수호자'로 활동, 한국 군경 의문사 유가족과 만나 협력논의
 
취재부   기사입력  2007/07/12 [11:46]
“예전에 (대만) 국방부는 상관의 학대나 군 생활 부적응으로 자살한 군인에게 터무니없는 액수의 장례식 보조비 외에 아무런 보상도하지 않았습니다. 2002년에야 국방부는 자살한 군인에게 질병 사망자와 같은 조건의 보상하도록 군인보상법을 개정했습니다.”

평범한 주부였다가 군에서 아들을 잃은 뒤 군인권활동가로 활약 중인 천비어(陳碧娥) 대만 군중인권촉진회 대표가 12일 국내 군,경 의문사 유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군의문사위, 위원장 이해동)의 초청으로 11일 방한한 천비어 대표는 12일 이해동 군의문사위 위원장 면담과 유가족 간담회, 강연회 등의 일정을 마치고 13일 오전 출국한다.

천 대표는 국내 군,경 의문사 유가족들에게 연대의 뜻을 전하고, 군에서 아들을 잃은 뒤 겪은 고통과 어려움, 대만의 군 사망자 예우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천비어 대표는 흔히 대만에서 ‘황마마’(황씨 성을 가진 아이의 엄마란 뜻)로 통한다. 1995년 6월 군복무 중이던 아들 황궈장(黃國章)이 배에서 뛰어내렸다는 군 당국의 설명과 달리 며칠 뒤 발견 된 아들의 시신은 상처투성이에다 머리엔 쇠못이 박혀 있었다. 이후 천비어는 군 인권활동가 ‘황마마’로 거듭나 대만 ‘군인의 어머니’로 통한다.

천비어 대표는 강연에서 아들의 죽음 당시 겪었던 아픔을 회상하며 “난 진실을 밝히려 군대와 접촉하려 노력했고, 그때서야 병사들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가혹한지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난 군내 사망 사고의 진실을 규명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또 보상 기준은 얼마나 터무니없이 엄격한 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인의 인권보호를 촉구하는 싸움을 벌이게 됐습니다.”

국방부에 찾아가 항의하던 중 수차례 수갑이 채워진 채 개처럼 끌려나오기도 했다. 길고도 외로운 싸움이었다. 천 대표가 처음 시작한 일은 희생자 가족들을 모아 군중인권촉진회(軍中人權促進會)를 설립한 것이다. 곧 신병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군인인권카드’를 나눠주고 군내 인권보호를 역설하며 곳곳을 누볐다.

군중인권촉진회는 군대내 심리상담의 필요성을 강조해, 결국 모든 대만 군부대에 ‘정신건강센터’가 설립돼 심리 교관의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아직은 심리교관의 수가 충분하진 않지만, 전문직 민간인들을 공개 선발해 운영 중이다.

천비어 대표는 1998년 3월 25일 국방부장관 면담을 통해 군인 보험제도 도입을 요구했는데, 그해 7월 1일 모든 장교와 사병을 위한 사고보험이 실시됐다. 수령 가능한 보험액은 2000년 현재 350만 대만화(약 9,800만원)이다.

또한 중증 장애를 입은 군인을 위한 종신 보호제도가 도입돼 전역한 뒤에도 무료로 치료받고, 요양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군내 사망사건의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운동을 꾸준히 벌였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1995년에 408명에 달했던 군내 사상자 수는 1999년엔 270여명, 2002년엔 200명으로 줄었다.

천 대표는 “아직 사망 사건의 조사결과가 유가족이 받아들일 정도로 밝혀지진 않았다”면서 “군대가 사망사건 문제를 전보다 공개하고 있으며,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황궈장 사건 때보다 훨씬 나아진 것만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활동을 통해 ‘미친 여자’라는 비난까지 받았던 황마마는 대만 군인권 개선의 상징이 됐다. 대만 국방부도 황마마를 국방정책의 입안·집행 감독기구인 ‘관병권익보장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하기에 이르렀다.

황마마는 군내 인권문제를 일깨우는 험난했던 12년의 세월이 “결코 혼자만은 아니었다”고 회상하며 유가족들을 격려했다.

“곡절 많은 시간을 지내며 낯모르는 따뜻한 분들의 지지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인생과 용기, 지식이 여러 면에서 받쳐주고 이끌어주었습니다.”

군의문사위 박종덕 사무국장은 “천비어 대표와 한국의 군의문사 유가족들은 중요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면서 “그건 바로 국방 의무를 수행하던 중 사망한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며, 모든 군인의 생명과 인권 지킴이로 거듭난 분들이란 점”이라고 강조했다.

박 사무국장은 또한 “오늘 만남이 단지 서로의 고통과 한을 나누는 것을 넘어 대만과 한국의 모든 젊은이의 인권을 고민하는 뜻 깊은 시간이자,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희망을 나누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병역 대신 사회봉사제도 채택한 대만을 가다!(대자보 62호, 2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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