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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화된 한국 언론에 책임은 없는가?
[교수신문의 눈] 언론은 객관성 상실하면 어떤 변명도 통할 수 없다
 
김병국   기사입력  2006/12/05 [12:42]
지금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어 불안해 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라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할 국가적 중대사인 행정수도와 지역균형 발전, 북한 핵실험과 대북 관계정립, FTA나 전시작전권 및 대미관계, 집값 폭등과 양극화 현상, 고실업률과 주저 앉는 경제문제 등의 해법을 놓고도 모두 이해관계와 상반된 가치관의 개입으로 논쟁화·사회세력화되어 쉽게 합의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이보다 더 큰 위기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특히 우리의 불안 의식이 가중되는 것은 참여 정부에 들어서 문제 해결 방식이 언론에 의한 정상적 여론형성 과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상은 보수든 진보든 포퓰리즘적으로 사회세력화된 힘에 의해 각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어 잠정적 미봉책에 의한 일시적 휴화산 상태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화려한 과거를 못 잊는 수구꼴통, 이땅에 애정을 버리고 양비론으로 위장된 방관자들, 어설픈 사명감과 열등의식에 젖은 독선, 배짱이 하루라도 어떻든 현재는 내 것이라며 계속되는 코드 인사 등의 불안한 동거라 하겠다. 이러한 요인들이 컴퓨터의 바이러스 퍼지듯 우리 사회에 퍼지고 있다. 그래 물에 녹지 않는 기름처럼 국민적 통합과 여론 형성을 위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작동 과정에 심각한 장애 요인이 뿌리 깊게 침전되어 나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언론은 우리에게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으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열정은 있는가. 혹 기존 언론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해법 없이 갈등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갈등을 증폭시키며 분열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 두 명제의 선후가 어떻든 간에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힘이 있는자에겐 무조건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기존 언론 모두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권력 앞에 선 언론,  굴종에서 협력 이젠 ‘갈등’으로
 
이와 관련하여 요 몇 십년간 우리 언론과 권력을 둘러싼 환경변화를 단순화하면 이렇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언론이 강한 권력 앞에 굴종하면서도 눈치껏 언론 흉내라도 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새벽닭의 역할을 하던 시기(대체로 1987년까지) 둘째, 언론과 권력 두 주체가 각자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 갈등과 협조를 반복하면서도 협조 쪽에 비중을 더 두려던 시기(1997년까지) 셋째, 서로 상대방의 역할과 권위를 별로 인정하지 않아 봐주기 없이 해보자며 협조보다 갈등 쪽에 무게를 두려는 현재 진행형의 과정이다.
 
여기서 언론의 책임론을 제기하며 먼저 권력과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그 성질은 다르지만 언론이나 권력이나 둘다 사회적 힘을 가진 양대 세력으로, 권력이 눈에 보이는 물리적 힘을 가졌다면 언론은 그에 대한 국민의 사랑과 신뢰가 힘의 원천이 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양대 세력이 건강한 균형과 견제를 통해 각계 각층의 의견에 수로를 놓아 공론을 조성하며 당당한 대결을 한다면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는 여론의 수렴과정과 이를 반영하여 집행하는 권력 모두에 박수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현실적인 힘을 가진 선출된 권력이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국민으로 하여금 교묘하게 언론을 불신케 하거나, 믿음의 체계를 가져야 할 언론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오만한 강자와의 대결에서 무력감을 느낀다면 국가적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도둑 맞으려니 개도 안 짖더라고 상대방을 탓하며 막가자는 식으로 여과되지 않은 표현을 쓰며 팔을 걷어 붙이는 권력에 감정적 맞대응을 했다면 분명 이는 성숙되지 못한 한국 언론의 정파성의 단면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흘러가는 물을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골을 트는 일을 해야 할 언론이 한차원 높게 긴 세월을 보며 유한한 권력을 바라보며 지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총이 아닌 펜을 든 언론에 과도한 주문을 한 듯하지만 어떻든 기존 언론이 수구 보수식으로 오해 받았다면 이 역시 이미지 관리를 잘못한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하겠다. 여러 조사에 의하면 오늘날 언론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부정적인 것도 사실인바 이는 결코 어리석지 않은 우리 국민에게 언론은 자기들이 지지 또는 비판해 온 정책들을 전문적 객관적 판단을 곁들여 제시하여 스스로의 신뢰성을 높이며 여론이 감정이나 선동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데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 정신이나 시대정신에 맞는 민주와 자본주의 공동체를 구현할 책임이 언론과 권력 모두에게 있는 것으로 서로 남의 탓을 할 일도 아니며 더구나 변화기적 한반도 상황에서 이는 역사적 큰 죄인의 길이 되는 것이다.
정부 없는 언론이나 언론 없는 정부라는 양자 택일이 아니라 언론과 정부의 건강한 균형이 민주국가의 요체이며 힘 있는자가 자제해야 할 책임의식의 전제다.
 
언론 스스로는 과연 윤리적인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며 현실적 힘을 휘두르는 권력과 똑같은 책임을 지라면 언론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 사회도 민주화 이후 권력은 과거에 취약했던 정통성을 적어도 눈에 보이게는 정비해 온 반면, 언론은 스스로 자정의 과정을 거치며 윤리성을 보강하였다고 하지만 국민의 더 높아진 눈높이에 맞추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어떤 방향성을 가진 시민단체들의 커진 목소리를 제대로 대응 소화해 내는데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 또한 새로운 정보전달 매체들이 뉴미디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신문 등 전통적 언론매체보다 양적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바 실제 TV 이외에 전통적 신문 등은 이들과의 대중적 영향력 경쟁에서는 밀리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안기부 도청 문건이나 황우석 사건 등에서와 같이 언론인들이 취재 보도에서 지켜야 할 기본 윤리에 여전히 둔감한 채 스스로를 변명하며 타 매체의 비판에 과잉 반응을 해 오고 있다. 또한 언론 자신의 문제가 <미디어오늘> <기자협회보> <오마이뉴스> 등에 의해 이미 뉴스거리가 되고 사회적 이슈화 되었는데도 기존의 보수적 입장에서 이해관계를 반영하며 정치적 영향력으로 해결하려는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지지층의 분할 방식이 나타나 자기를 지지하는 독자층과 더욱 긴밀히 보도 방향을 맞추려 하며 보수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객관성을 잃어 가고 있다. 국민을 대신하여 권력을 감시해야 하는 언론에게 객관성은 생명이고 근본이며 이런 전제하에 나름대로 의견의 정파성을 가질 수 있는데, 이미 정해진 입장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언론자유로 착각하는 경향마저 있다. 
 
▲김병국 원광대·언론학 교수. 필자는 서울대에서 ‘언론법제’를 전공했다. 저서로 ‘누구를 위한 언론 자유인가?’ ‘커뮤니 케이션 사상사’ 등이 있다.     © 교수신문 제공
객관성을 상실하면 어떤 변명도 통할 수 없으며, 법과 윤리의 수단을 지키지 않으면서 목적을 정당화시켜서는 안된다. 언론의 힘은 정부의 강제적 권력과 달리 국민의 사랑과 신뢰 속에서 나온다. 언론사는 물론 언론인 개인 역시 철저히 상호비판 속에 도덕적 재무장이 필요하다는 점은 다시금 강조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국민의 언론은 잘못나가면 국민을 불편하게 할 뿐 아니라 국가를 위기로 몰수도 있는 권력에 대해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힘이 되어야 할 언론과 언론인은 자신의 윤리성과 자율적 규제 문제를 먼저 되돌아 보아야 한다.

* 본문은 <대자보>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교수신문>(www.kyosu.net)에서 제공한 것이며, 본문의 제목은 원제와 조금 다르게 편집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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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2/05 [12:4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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