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출세했었다는 최연희와 황우석. 이들이 이루어낸 사회적 성과(양지)와 대조적으로 음지도 만들어 내었다. 성추행 피해자를 만들어낸 최연희, 난자기증 희생자들을 탄생시키고 스스로 난자매수범죄를 저지른 황우석이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이들의 욕심만큼이나 지속되고 있다. 자기반성을 통해 자기 욕심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욕심의 화신이 된 이들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도덕경 제9장은 최연희와 황우석에게는 한줄기 희망, 구세주가 될 수 있다. 이런 선물을 마다하고 최연희가 의원직을 고수할 욕심으로 혹시라도 항소를 제기하거나, 황우석이 집착에 빠져 불나방처럼 행동(파면처분 최소소송)했던 것은 더욱더 빨리 자기 무덤을 파는 격이다.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자기반성을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도덕경 제9장
持而盈之, 不如其巳 : 지이영지 불여기이 揣而銳之, 不可長保 : 취이예지 불가장보 金玉滿堂, 莫之能守 : 금옥만당 막지능수 富貴而驕, 自遺其咎 : 부귀이교 자유기구 功遂身退 : 공수신퇴 天之道 : 천지도 반야심경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이란 말이 있다. 여기서 '공(空)'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만물이 하나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도 각자 개인의 육체에 속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마음이 일으키는 착각이다. 인간의 마음도 대자연과 이웃사람들 마음과 연계를 맺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아에 사로잡혀서 개인의 육체 단위로 딱 떼어내서 인식하면 말짱 헛되다 즉 진리를 깨달을 길이 없다는 뜻이다.
持而盈之, 不如其巳 : 욕심을 제어하지 않고 계속 채우는 건 그것을 중단하는 것만 못하다. 마음을 온 우주와 연결 지어 관조하는 무한대의 깨달음 '공(空)사상'이 있는 반면에, 대조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사로잡힌 자아는 자기 스스로를 깨닫지 못하고 만다.
자아는 욕심을 채우는데 계속 에너지를 소진하지만 그럴수록 진정한 지복감을 주지 못하며 허기는 계속된다. 욕심은 재물이나 명예 혹은 권력을 쟁취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런 세속적인 것을 끊임없이 계속 추구한다면 행복하게 살기는커녕 오히려 탈이 나게 되어 있다. 욕심이란 한낱 일시적인 에너지일 뿐 영속되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다 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욕심을 멈추고 그것이 무엇인지 실체를 바라보아야 한다. 욕심이라는 개인의 육체 작용은 죽으면 끝난다. 욕심을 계속 채우려하면 빨리 병이 나고 빨리 죽어간다. 누구나 모두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간다. 그런 사실을 잊은 채 욕심에 사로잡혀 욕심을 만족시키기에 바쁜 삶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죽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욕심에 사로잡히고 만다.
재물, 명예, 권력은 무지가 추구하는 가치이며 무지한 사람들의 획득물이다. 무지한 마음은 진리를 깨닫는 참된 삶을 상상조차하기 어렵다. 그런 어마어마한 광활한 광장이 있으리라고 짐작조차 할 수가 없으니 깨달음의 세계를 맛보려고 계획하지 않는다.
揣而銳之, 不可長保 : 아무리 튼튼하게 기둥을 많이 세워도 오래 영원토록 보존할 수는 없다. 끝없는 욕심으로 치달아봤자 결국 모두 헛되이 죽어갈 것이다.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만 하는 집착에 빠지면 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죽음으로 끝나버린다.
金玉滿堂, 莫之能守 : 금과 옥을 가득 채워 놓은 집은 결국 지킬 수가 없다.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 욕심으로 취득한 어떤 것도 결국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욕심이 헛된 일시적인 에너지에 불과하듯이. 높은 지성이 쌓아올린 가치들도 세속적으로는 보물처럼 0000보이지만 진리에 대한 눈을 멀게 하기 때문에 사상누각이 된다. 지성이 쌓아올린 수많은 철학과 사상이 생의 진정한 의미를 말살시키거나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 왔다. 여기서 물질을 상징하는 금과옥이 진정한 보물인가, 아니면 마음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보물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는 문구이다.
富貴而驕, 自遺其咎 : 부귀는 사람 마음을 교만하게 한다.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결과를 낳는다.
교만한 마음은 자발적 가난을 택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이 스스로 고생함으로써 터득하는 마음의 본질을 상상할 기회조차 없다. 고난없이 내면의 진리에 다가갈 기회는 없다. 부귀는 엄청나고 광대한 진리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차단시키는 작용을 하기 마련이다. 부귀한 자가 깨닫는 기회를 가지려면 마음을 버려야 한다. 즉 부귀를 버려야 한다. 죽음과 함께 끝나버리는 부귀 따위와 깨달음의 세계는 비교할 수도 없는 대상이다. 무지를 안고 죽어가면서 가치 있는 생이었다고 편안히 눈감을 수 있을까? 부귀의 노예가 되어 살아온 생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 살고 싶어 안타까워하면서 불행하게 죽어간다. 깨달은 자들은 지복을 누리며 살다 죽음을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功遂身退, 天之道 : 욕심으로 얻거나 이루면 몸은 물러난다. 그것이 대자연법칙이다. 욕심으로 뭔가를 이루면 욕심이 사용하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어 몸은 더 빨리 죽어간다. 더 많이 얻으려거나 이루려고 집착하면 더욱더 빨리 자기가 죽어간다.
적당히 욕심을 부리고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적당주의나 과욕이나 진리를 보지 못하는 무지에 속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욕심의 실체를 보려하지 않고 욕심에 사로잡혀 뭔가 이루려고 에너지를 낭비함으로써 세속적인 부귀, 영화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결국 헛되이 죽어갈 뿐이다.
욕심을 순수하게 바라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며 자기 욕심이나 마음이 온 우주와 하나로 서로 연결되어진 무엇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죽음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삶의 다른 면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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