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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미국주도 ‘지구화 담론’은 끝났다
[홍기빈 칼럼] 거센 반지구화, 자본의 지구화에 맞서 우리 현실 직시해야
 
홍기빈   기사입력  2006/10/20 [11:29]
어떤 특정한 담론은 그 담론의 논리적 구조를 떠받치는 각종 이론과 개념 수사학 등의 "관념적" 요소를 한 축으로 또 거기에 조응하는 현실의 제도나 현실 상황의 전개 등과 같은 "물질적" 요소를 또 다른 축으로 가진다. 헤겔은 "현실성"을 "가능한 것과 현존하는 것의 결합"이라고 한 바 있다. 담론은 그렇게 우리 눈앞에 현존하는 "물질적" 요소와 그것의 이론적 가능성과 필연성을 논하는 "관념적 요소" 모두를 갖추고 있으므로 단순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와 달리 사람들에게 "논박 불능"의 "현실"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담론" 앞에 부닺히게 되면 비판이건 논박이건 해볼 여지를 잃고 그것을 그냥 "현실"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이 "현실"을 거부하려는 자들은 "다른 대안이 있는가"라는 심문을 받게 되고 대답을 머뭇거리게 되면 "현실 도피주의자"들이라는 딱지를 얻게 된다. 이것이 담론의 힘이다.
 
지구화(globalization)는 90년대의 세계를 지배했던 하나의 "담론"이었다.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이론과 현실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그래서 이론과 현실 양쪽에서 설교를 들어야 했다. 먼저 "지구화는 역사의 바람직한 방향이요 또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바이다"라는 이론적 사상적 차원.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명제. 그리고 온갖 과학 기술 특히 디지털 혁명 등을 통한 정보 금융 시대의 도래 등등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주어진 위에, '자유 무역의 혜택'이라든가 폐쇄적 '국민 경제'의 시대착오적 규제의 비효율성 등 200년 묵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적 사상적 전통이 합쳐졌다. 그리하여 지구화가 어째서 '시대정신'일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온갖 방향에서의 담화가 정계와 대학과 매체에 울려퍼졌다.
 
이에 조응하는 현실적인 상황과 흐름 또한 굳건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보였다. 첫째, 냉전 이후 특히 1차 걸프전 이후의 세계 정치는 미국 주도 하에 UN의 틀 안에서 주요 강국들이 합의를 이루어 느슨하나마 제도적 법적 질서가 전지구적으로 관철되는 '지구적 통치'의 구조로 가고 있었다. 둘째, 기존의 GATT 체제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훨씬 심화된 WTO라는 새로운 다자적 무역 체제와 OECD 국가들의 다자간 투자협정(MAI)으로 까지 발전하여, 물자와 서비스는 물론, 자본과 지식 정보까지 포함한 포괄적인 지구 경제의 상이 발전되고 있었다. 셋째, 각국 내부의 지배 세력들 자체가 7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국가 주도의 '국민 경제'의 틀을 개방과 규제 철폐의 방향으로 해체해야 한다는 합의를 널리 공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90년대의 한복판에서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라는 한국적 신조어를 만들어낸 이후 한국에서의 주류 담론에서도 이 지구화는 거스를 수 없는 지상 명령으로 아예 상식적인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이름으로 가운데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무책임한 좌파 세력'이나 "시대를 읽지 못한 낡은 퇴행적 지식인들"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화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세력은 지구적으로도 국내적으로도 항상 존재해왔고, 그들의 비판은 주로 지구화라는 현상의 반사회적 비인간적 결과에 대한 도덕적 측면에 초점이 있었다. 필자는 도덕적 차원이 아니라 지구화 담론의 적실성이라는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90년대에 생겨난 지구화 담론을 이루는 이론적 현실적 두 차원 각각에서 이 담론이 2006년의 지구적 또 한국적 현실에서 어느 만큼의 값을 갖는지를 냉철히 따져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2001년의 9.11 사건과 그 이후의 지구정치경제의 구조변화는 지구화 담론을 떠받치는 현실적 차원의 기둥을 근본적으로 허물어놓고 있다. 현재 세계의 상태는 한마디로 지정학적 갈등이라는 '옛 왕의 귀환'이 벌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미국 주도하의 일극적 세계 질서에서 모두 다 '평화 배당금'을 받아가던 시절은 끝났다. 미국은 노골적으로 중동과 카스피해와 중앙 아시아로 진출하는 고전적인 지정학의 유라시아 대륙 '심장 지대(heartland)'의 경략에 나섰고, 중국과 러시아는 여기에 대항하여 각자의 지정학적 전략에 입각한 대응을 하고 있고, 이슬람 세력이 급격하게 정치화되기 시작했고, 북한에는 핵무기가 생기고 말았다.
 
이러한 지정학의 귀환으로 인해 WTO 와  MAI 가 꿈꾸던 다자주의적 세계 경제 질서는 급격하게 보호주의와 양자간 무역 및 투자 협정 심지어 기초 원자재나 석유를 둘러싼 구상무역으로까지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관행이 각국의 지정학적 전략과 긴밀하게 결합된 안보적 무기로 변질되고 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이 지구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사회적 불안정성과 양극화는 거센 반지구화 운동을 야기시켰고, 이는 결국 국내와 지구적 차원 모두에서 대중적인 지구화 담론의 정당성을 심하게 침식시켰다는 점이다. 그래서 2000년대의 지구 각국의 정치 세력들은 더 이상 90년대의 규제 철폐니 효율성이니 하는 신자유주의 담론에 기대기보다는 경쟁적 민족주의나 노골적인 인민주의와 같은 것으로 정당성의 기제를 이동시키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유럽과 특히 남미를 휩쓸어간 좌파 혹은 인민주의적 정당의 집권을 보라.
 
이렇게 지구화 담론의 '현실'의 기둥이 무너지게 된 상황에서 나머지 하나인 '이론'의 기둥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먼저 '역사의 종말'이라는 담론은 이제 다시 확실하게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미국식의 시장과 자유주의 체제가 역사의 완성점이라는 낙관주의는 이제 아무런 이론적 사상적 설득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과학 기술 특히 디지털 붐을 앞세운 소위 '신 경제(New Economy)'의 거품은 무너져버렸다. 세계적인 시장 개방이 지구적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류 경제학과 IMF 및 세계 은행의 약속은 지난 15년간의 미미한 성장률과 오히려 급속하게 진행된 지구적 양극화의 흐름을 겪은 사람들에게 과히 과학적 진리라고 느껴지기 힘들게 되었다.
 
여기서 두 가지 차원의 지구화를 구별해야 한다. 첫 번째는 지금까지 말해온, 90년대에 생겨난 담론으로서의 지구화이며, 둘째는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져온 '자본의 지구화'의 차원이다. 첫 번째 차원 즉 담론으로서의 지구화의 모호한 연막 속에서 이 두 번째 차원의 지구화가 가차없이 진행되어 지구적 규모의 자본 축적이 벌어져 왔다는 것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2000년대의 여러 변화의 와중에서도 일관되게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도 바로 이 '자본의 지구화'이다. 만약 이 두 번째 차원의 지구화라는 의미라면 지구화는 계속되고 있으며 '계산해 볼 수 있는 미래'의 시야에서는 앞으로도 줄곧 계속될 현실이다. 이 '자본의 지구화'에 어떤 식으로 대응해 나갈 것인가는 우리들에게 대단히 의미있는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즉 90년대에 만들어진 담론으로서의 지구화는 이제 끝났다. 이미 현실은 그 자기 만족적인 낙관주의의 지구화 담론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90년대의 지구화 담론을 렌즈로 삼아 세계를 보려하고 설명하려하고 또 주장하려 드는 것은 아주 고전적인 정의 그대로 '허위 의식'일 뿐이다. 그 '허위 의식'에서 얼마나 빨리 깨어나와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집단적인 운명이 좌우되는 절박한 시점이 2006년의 지구요 한반도이다.   
 
* <출판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홍기빈은 진보적 소장학자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며 캐나다 요크대에서 지구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와 <칼 폴라니의 정치경제학-19세기 금본위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개마고원 2004),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녹색평론, 2006) 등 경제연구와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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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0/20 [11:2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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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고 2006/10/23 [12:33] 수정 | 삭제
  • 한국은 그 첫타자인가?
  • 파트라슈 2006/10/20 [17:21] 수정 | 삭제
  • 이게 뭐 끝나고 말고 할 담론인가요. 아직 헤게모니가 유지되고 있느냐 아니냐는 문제죠, 그리고 어떤 주장이 지금 대중을 장악하고 있죠? 아직 끝나지 않은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배담론은 형태를 변경할 뿐, 결국 가진 자들의 이익을 위한 담론이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상황은 똑 같을 거란 거죠. 세계화든 지역화든, 미국의 국제주의든 고립주의든 대체로 먹고살기 힘든 건 비슷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