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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보수양당 체제, 개혁은 가능한가
[논단] 개혁은 거대한 민중의 열망이 공적 영역에 표출될 때 가능하다
 
송준모   기사입력  2006/10/04 [02:56]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로 한국사회를 좌우하고 있는 키워드는 개혁이라는 단어다.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전현직 대통령들이 개혁적 이미지를 내세워 당선되었다는 점을 본다면 개혁이라는 말은 폭넓은 지지를 받는 광의적 단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무명 정치인에서 일약 정치스타가 되어 대통령 타이틀을 거머쥔 노무현 대통령은 이러한 개혁 의제의 힘을 잘 알고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최근에 들어 개혁 강박증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은 한번 효과를 보았던 수단에 대한 집착일 것이다. 이제 서민들은 개혁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바뀐 것은 얼마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얼마전에 이렇게 무뎌져가는 개혁이라는 무기를 다시 한번 예리하게 갈아보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이 ‘진보개혁연합’ 의 개념을 제창하며 민주노동당에게 내년 대선을 위한 연합을 제안한 것이다. 이 정도면 권영길에게 가는 표는 사표이니 노무현을 찍어야 한다는 유시민의 발언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5.31 총선결과와 각종 여론을 통하여 한나라당 집권에 대한 위기감은 높아져 가지만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에서 나온 정신착란적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김근태 의장이 재계에 날린 뉴딜이라는 러브콜이 묻혀버린 상황에서 나온 문어발식 연합론을 보며 과연 무엇이 정치적 매춘인지 자신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민병두 의원이 어떻게 민주노동당과 자신들을 ‘중도개혁’ 이라는 단어로 묶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내재적 접근을 해보면 열린우리당 의원들 입장에서는 민주노동당이나 자신들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등등 많은 사안에서 입장이 겹치고 한미FTA나 이라크 파병에 대한 이견은 좁힐 수 있는 차이가 아니겠는가. 바로 이것이 열린우리당의 문제다. 이 문제를 극복하지 않는 한 앞으로 어떤 개혁적 정당도 사회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집권 자체가 불가능해 질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근본적 차이는 유권자층의 설정에 있다. 김근태 의장이 양대 노총이 아닌 상공회의소로 달려간 것은 정해진 수순이였다. 이들은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는 스웨덴의 대타협을 이루어낼 역량도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애초에 부르주아 정당으로 출발하였기에 자본가 계급의 ‘시혜’ 를 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들의 운명인 것이다. 노무현-이건희 체제는 부르주아 기성정당에 의한 정치의 한계와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여정부 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 졌는가.

그리고 서민의 삶은 나아졌는가. 일하는 사람들이 살기 좋아졌는가.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이것은 국민에 대한 기만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구조 하에서 이러한 부르주아 정당 정치체제는 손쉬운 국민여론 관리가 가능하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기업의 이익은 곧 국가의 이익이며 국가의 이익은 자신의 이익이라는 도식에 익숙해진 국민들은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정책들에 쉽게 동조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정치인들은 국익=개인의 이익이라는 도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여 ‘국익’ 을 생산하는 기업가들만을 위한 정책을 정당화시킨다.

경쟁관계에 있는 부르주아 정당들의 러브콜을 끊임없이 받는 기업가들은 박정희 정권과 같은 찬사 또는 투자를 못하겠다는 등의 말로 여론을 뒤흔들어 놓는다. 국민은 이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여론이 이렇게 움직이는 한 정치인들은 기업가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 정치인들이 스스로 만든 족쇄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볼 때 정치는 기업이 사회에 던지는 그림자가 될 것이라는 존 듀이의 지적은 현실이다.

하지만 국민이 일하는 기계가 아닌 이상 이러한 체제가 불만 없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는 없다. 개혁은 이 불만들에 대한 마약이다.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가속화되면서 발생하는 각종 사회문제에 대하여 개혁이라는 관성적 처방을 남발하다보니 개혁 강박증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면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와 민생경제를 대치시키는 한나라당의 몰지성적 비난은 일면 유효하다.

사회의 하부구조이자 최종심급인 경제적 생산구조를 도외시 한 채 이념 등의 정치사회적 상부구조에 약간의 메스를 가하는 것은 도마뱀을 죽이기 위하여 꼬리만 자르는 격이다. 상부구조가 기반하고 있는 하부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상부구조는 끊임없이 재생산 되며 헤게모니는 유지된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졌어도 노동자의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재 정치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류세력은 독재정권 시절 정치체제 민주화에 주된 관심이 있었지 생산관계 변혁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빈약하였다.

이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노학연대 활동의 대부분도 노동자의 인간이하의 삶에 대한 연민이 우선하였을 뿐 노동자를 착취하는 근본적 시스템 자체에 대한 고찰은 부족하였다.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 악마적 독재자를 물리치고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하면 모든 것이 올바로 돌아갈 줄 알았던 것이다. 결국 정치적 타협을 통한 87년 체제 구축으로 이들의 생각은 순진한 허구였음이 판명되었다. 군사독재의 손에서 벗어나니 보수주의를 강요하는 자본의 손에 잡혀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노동자가 아닌 기업가를 주도적 지지세력으로 설정한 정치가는 자본을 통제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본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산관계에 손을 대는 근본적 개혁이 이루어 질 수 없음은 자명하다. 자본의 직접적 이익과 관계되는 생산구조에 대한 개혁이 아닌 정치적 수사 수준의 부분적 자유화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고 민중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여기서 부르주아 개혁정당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민중은 개혁을 원하지만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서 자본가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정책을 펼쳐야 한다. 보수주의 헤게모니는 정치를 자신들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놓으려 하지만 자본은 한편으로 모든 보수적 관계를 파괴한다. 자본의 폭주가 불러오는 사회적 혼란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생산관계 개혁이 절실하지만 이것은 자본에 의하여 막혀 있다.

결국 이러한 자기모순 속에서 정치는 갈 길을 잃으며 개혁을 빙자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양극화를 가속화한다. 민중은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개혁 때문에 자신들의 삶이 더 어려워진다고 생각하여 개혁 의제에 대하여 부정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 부르주아 개혁정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개혁을 밀어붙이자니 자본가 계층과 충돌하고 개혁을 포기하자니 자신들의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

어느 쪽이든 민중의 원성을 사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개혁정당이 총체적 난국에 빠져있는 교착상태에서 민중은 새로운 세력을 찾아 헤맨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경제만 잡으면 된다는 말은 민중의 생각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가와 지주계급 등 모든 구세력과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반동적 정당은 이러한 민중의 심리를 읽고 천민 자본주의의 논리를 내세우며 생산관계와 경제 성장을 슬쩍 바꿔치기 함으로써 지지율을 확보한다. 개혁정당은 딜레마에 빠지고 반동적 정당은 날로 영향력이 커지는 현 상황에서 중산층의 파멸과 자본가와 지주의 승리로 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인가.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천민 자본주의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단 말인가.

답은 노동자 정당에 있다. 아니 굳이 노동자라는 마르크스적 도식을 빌리지 않아도 괜찮다. 한국사회의 80%에 기반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정당만이 진정한 한국사회의 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다. 앞에서 보았다시피 자본가들의 이익과 얽혀있는 부르주아 개혁정당은 개혁을 이루어낼 힘이 없어 결국 헤게모니에 소극적으로 편입되며 헤게모니를 방어하기 위하여 창설된 반동적 정당에는 애초에 기대할 것이 없다.

정치적 기반을 다수의 민중에 두고 있고 이들을 위하여 왜곡된 생산관계를 바로잡는 정당만이 한국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민중의 정당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계급의식이 필수적이다.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개혁을 원하는 민중이 많더라도 결국은 반동적 움직임으로 회귀하게 된다. 개혁에 대한 열망을 계급의 이름으로 하나로 모으는 것이 개혁을 위한 첫걸음이자 원동력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보수양당체제는 몇세대가 흘러도 어떤 변혁도 이루어 낼 수 없다. 유럽의 역동적인 정치문화와 미국의 기성적 정치문화를 비교해 본다면 쉽게 답이 나올 것이다. 민중이 없는 정치판은 말 그대로 부르주아의 일상사를 처리하기 위한 위원회에 불과하다. 개혁은 부르주아 정치인이 부르짖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민중의 열망이 구체적 모습을 갖추어 공적 영역에 표출될 때 모든 보수세력은 그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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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0/04 [02:5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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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친이반 2006/10/04 [17:20] 수정 | 삭제
  • 자신의 기반이 노동에 있음에도 노동자 연대의식은 없는게 현실인데.. 국민들이 개혁을 전적으로 바란다는 도식은 버려야 할 듯.. 자신은 손해보고 싶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