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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후예들, 그래도 서울대 총장은 하고 싶다
[우리힘의 눈] 이병도의 친일과 손자 이장무 교수의 처신
 
방학진   기사입력  2006/09/07 [19:27]
서울대 총장으로 취임한 이장무 교수는 역대 어느 총장들보다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바로 할아버지인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1896∼1989)의 친일 행적 때문이다. 친일 문제에 관련한 논쟁이 있을 때마다 이병도는 역사 분야에서 첫째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좀처럼 이병도에 대한 논쟁이나 논란은 결코 길게 이어지는 법이 없다. 여성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김활란이나, 대를 이어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박정희, 그리고 누가 언제부터 그렇게 이름 붙였는지 모르지만 국민시인이라는 서정주 경우와 매우 대비된다는 말이다.

▲ 조선사편수회 직원, 진단학회 회장, 제7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이병도    
그럼 그 까닭은 뭘까. 까닭은 간단하다. 이병도의 친일이 거론될 때마다 그것을 적극 옹호하는 사람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웬만한 친일파처럼 동상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기념사업이 떠들썩하게 열리는 것도 없다 (물론 이병도가 일제시대 주도해 만들어서 아직까지 존재하는 진단학회에서 해마다 그자의 호를 따서 수여하는 두계학술상이 1980년부터 생겼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마디로 싸움할 상대가 안 보이니 논쟁이 지속될 여지가 없다. 어찌 보면 김성수와 방응모의 친일을 공적 도구인 신문 지면으로 과민하게 변호하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 견주면 이병도의 후손들이나 변호 세력은 훨씬 영리한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병도의 후손들이 이번에는 작전을 바꾸면서까지 모습을 드러냄은 물론 할아버지의 친일을 적극 변호하고 나섰다. 물론 이장무 총장에 앞서 친동생인 이건무 씨가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명될 때도 이와 비슷한 논란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큰 반향은 아니었다. 결국 서울대 총장이라는 자리는 자기 배경을 드러내면서까지 차지하고 싶은 괜찮은 자리인 모양이다.

1896년 우봉 이씨 집성촌인 경기 용인에서 태어난 이병도가 세간에 이완용의 손자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아마도 우봉 이씨 항렬을 단순 대입하면서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당시 한일병탄에 1등 공신으로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이완용과 같은 가문인 그자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1912년 주로 관료로 진출하는 통로로 여겨졌던 보성전문학교(오늘의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그자는 졸업 뒤 역사학으로 관심을 돌려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간다.

1919년 와세대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오늘의 중앙고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1925∼1927)와 촉탁(오늘의 계약직. 1927∼1938)으로 일하게 된다. 조선사편수회란 말할 것도 없이 일제의 조선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총독부의 한 기구로서 정무총감이 회장이며 편수위원-수사관-수사관보-서기 같은 체계를 이룬다. 요즘으로 말하면 당시 편수위원은 중견학자, 수사관과 수사관보는 박사급 연구자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실무 편수 작업은 수사관과 수사관보의 손에서 이뤄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병도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해인 1919년 2월은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2·8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는데 그 대열에 이병도는 보이지 않는다. 1930년대 조선인 지식인들이 대거 친일로 전향하기는 하지만 1919년 무렵 적지 않은 조선인 유학생들이 한번쯤 항일운동을 한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병도였다.

당시 조선의 저항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조선사편수회가 결국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1928년 최남선이 촉탁으로 조선사 편수위원으로 들어가자 평소 절친한 사이였던 정인보가 "육당은 죽었다"는 조문을 쓰기도 했는데 이병도가 이 같은 사실을 몰랐을 리 만무하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어떤 지식인이 당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글을 실을 경우에는 변절한 것으로 여겨져 매일신보의 약칭이 '매신'인 점에 빗대어 일제에 '몸을 팔았다'는 뜻으로 '매신했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에 그 이름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이병도. 왼쪽은 수사관보 시절의 이병도, 오른쪽은 촉탁 시절의 이병도이다.     © 시민의 신문 제공

이처럼 이병도는 다른 친일파와 달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 일제에 협조했지만 조선사편수회 이후 진단학회를 만들어 조선사 연구에 힘썼다고 하면서 변호하는 목소리가 있다. 진단학회의 일정한 구실과 성과까지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그자가 오랜 기간 일제에 협력한 것을 덮어 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자기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역사 연구를 역설해 온 이병도의 주장에 따르더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자의 친일은 객관인 사실이므로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역사 연구에 있어서 오직 실재하는 문헌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겠으나 모든 사실이 문헌에 기록되지도 않을 뿐더러 문헌에만 역사학이 갇혀서 학자들의 상상력과 직관이 무시된다면 역사학은 인간에게 아무런 영감과 미래를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자료 수집과 접근이 제한된 형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렇게 해방을 맞은 이병도는 역시 조선사편수회에 함께 근무한 신석호(1904∼1981)와 더불어 한국사학계의 대부로 등장해 문교부 장관, 국사편찬위원, 학술원 회장,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따위 학계 주요 자리를 거친다. 덕분에 그자의 제자들은 사학계에 막강한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친일파들이 해방 뒤 정계에 몸을 담그는 것과 달리 그자는 학계에만 주로 머물렀지만 박정희 정권의 5·16민족상 이사나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 활동 따위에서 보듯이 그자는 체질부터 권력에 대한 저항 의식은 애초부터 없었다.
이제 다시 이장무 교수의 총장 임명에 대해서 살펴보자. 연좌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할아버지가 친일파니까 대학 총장 같은 공직이나 요직에 오를 수 없다는 주장에는 나 역시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 같은 주장은 주장하는 사람에게 언제든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 수 있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또한 이번 논란에 대해 사전에 한마디도 공식 언급을 한 바가 없다. 이 문제를 처음부터 제기해 온 〈시민의 신문〉 정지환 기자 역시 기사를 작성하기 앞서 이 문제를 연좌제와 결부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다만 아마도 정 기자가 원했던 것은 법적 책임이 아닌 우리 사회 고위 인사들의 최소한의 도덕적 자기 성찰이었을 것이다. 대학 1학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또 후배들에게 전했던 말이 있다. "지금 네가 대학생인 된 것은 네가 똑똑하고 잘나서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의 경쟁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수많은 동료들의 희생 위에 네가 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인 예비 지성인으로서 항상 사회적 책무를 다해라."

"사실과 다른 허위보도 기사를 삭제하고 정정 기사를 게재하지 않을 시엔 부득이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거나 "조부의 친일 문제나 사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가 밝힐 것이고, 과학 분야만 공부해 온 저로서는 잘 모르는 일"이라는 이장무 교수의 말은 그래서 실망스럽다.

덧붙이는 말 : 이번 서울대 총장 선거는 학칙을 개정해 행정직 직원에게 투표권을 주고 1인당 0.1표로 계산했다고 한다. 서울대 직원의 값어치는 교수의 1/10정도라는 말인가. 어찌 이런 일을 버젓이 저지르는지 한심하다.
 
* 글쓴이는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입니다.
* 본문은 대자보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우리힘닷컴'(www.woorihim.com)에서 제공한 것으로, 다른 사이트에 소개시에는 원 출처를 명기 바랍니다.    
* 본문의 제목은 원제와 조금 다르게 편집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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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9/07 [19:2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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