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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왜곡된 비판'을 비판한다
신권언유착의 시대에 편향된 글쓰기
 
변희재   기사입력  2002/12/23 [11:33]
5공비리 청문회 때부터 야당 정치인 노무현을 지지해왔던 나는 어느새 친 여당 및 친 대통령 논객이 되고 말았다.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를 생각해볼 때 아마도 나 뿐 아니라 노사모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의 위상 변화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는 10월 11일 [정몽준 지지자를 해부한다]는 글을 시작으로 26편의 글을 썼으며, 소재만 다를 뿐 글의 전체 논조는 사실 상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였다. 특정 정치인을 특정한 지위에 올리기 위해 나의 글을 팔았던 셈이다. 아무래도 권언유착이라는 비판이 귀에 거슬려 그랬는지 나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어차피 각 정당으로부터 감투를 쓰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해당 후보측으로부터 밥 한끼도 얻어먹지 않은 사람들끼리 논쟁과 토론을 한다면 어떤 주장을 하든 최소한 그 사람의 양심에 따른 판단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IMAGE2_LEFT}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을 전후하여 친 노무현 논객들의 비판은 줄기차게 이루어졌다. 친 노무현 논객들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어떠한 쟁점 사안에 대해 특정 후보나 정당에 유불리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것이겠다. 실제로 이에 대해서 가장 많은 비판을 가한 논객은 진중권이다.

물론 나는 그를 토론이나 논쟁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토론과 논쟁을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실조작과 왜곡을 범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닌 이상 그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에 그의 비판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그의 [천박한 친 민주당 언론과 논객들]이라는 글에서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가령 서울시장 선거 때 김민석은 노무현과 운명공동체가 되었다가, 그후 탈당를 한 다음에는 다시 역적이 되었다가, 후보단일화 논의가 진행되자 그의 문제의식만은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가, 후단 과정에서 그가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우는 국민통합21측의 매파로 드러나자 다시 그를 비난하는 등, 논조가 번번히 달라짐...."

김민석이 노무현에게 도움이 될 때에는 영웅이지만 해가 될 때는 순식간에 역적이 되고마는 판단 기준에 대한 비판이이다. 정말 이 말이 진실일까? 친 노무현 논객들의 판단 기준은 오직 노무현에 대한 유불리만을 따지고 있단 말인가?

이 부분은 의외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진중권은 역시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시켰다. 예를 들면 '후보단일화 논의가 진행되자 그의 문제의식만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바로 '나'이다. 나는 진중권이 말한 뜻에서 문제의식을 이해하자고 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어차피 정몽준 쪽으로 마음을 정했으면서 당 내에서 자당 후보를 흔들고 있는 후단협 의원들을 비판하기 위해 김민석을 옆에 세워놓았을 뿐이다. 진중권이 텍스트를 읽을 줄 안다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아마도 그가 항상 그래왔듯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의 주장을 비실명으로 거론하며 뒤틀었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중권이 아니라 그에 동감하는 문제의식이다. 나는 여기서도 진중권의 문제의식만은 존중하고 있지 않은가?

논객이 하나의 특정한 목적을 갖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정당한가? 문제를 압축시키면 이러한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사실 이 문제는 2002년도에 처음 제기된 것이 아니다. 97년도 대선 때 이른바 강준만 - 손호철 논쟁 때도 뜨거운 감자였다.

호남의 지역주의 문제로 강준만과 손호철이 토론을 벌일 때 지식인이란 옳고 그른 공정한 판단만을 내려주면 되는 것이지, 운동가나 선동가 노릇을 해선 곤란하다는 것이 당시 강준만의 입장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진중권의 말을 들어보면 친 노무현 논객들의 대표주자나 다름없는 강준만이 5년 전에는 공정한 심판론을 들면서 좌파 논객 손호철을 공격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로 그 '공정성'이 되겠다. 강준만은 지역주의 문제에서 호남의 손을 들어주는 것을 공정하다고 보았다. 반면 손호철은 영남도 나쁘고 호남도 나쁘다는 양비론을 펴는 것을 공정하다고 보았다. 둘 다 공정성을 내세우지만 강준만의 공정성은 민주당의 당파성에 도움을 주고 손호철의 공정성은 국민승리21과 당시 신한국당의 당파성에 도움을 주었다.

강준만의 공정한 심판론은 설사 한 쪽의 입장을 들어주는 것이 특정 정파에 이익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옳다면 옳다고 외치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한국의 언로에서는 기계적 양비론이 팽배했으므로 이런 태도는 매우 희귀했다.

그러나 실제 정치판에서 불편부당한 공정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중선거구제, 지역할당제 등도 특정 정당의 유불리와 관계가 깊다. 언론계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팩트의 취사선택부터 모든 것이 당파성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럼에도 한국의 언론은 미국의 언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언론이 불편부당과 객관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미국의 언론이 당 기관지로 시작하여 지금과 같이 객관성을 내세운 대중지로 발전하는 데에는 상업주의가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민주당 기관지로 사업을 하면 한나라당 독자를 잃어버리고, 한나라당 기관지로 사업을 하면, 민주당 독자들을 잃어버리므로 이 둘을 한데 묶어 객관으로 포장한 새로운 언론사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의 조중동이 겉모습만 그대로 이어받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독자 모두를 끌어들여 힘을 키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온갖 왜곡을 저지르며, 특정 정당에 유리한 기사를 연속적으로 내보내는 방식 말이다.

나는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처음부터 논객이든 언론이든 불편부당한 공정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설사 그게 가능하다 할지라도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기계적 양비론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계적 양비론은 오직 힘의 논리에 지배받는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비슷한 힘을 갖고 있으므로 민주당 한번 보도하고 한나라당 한번 보도하면 그게 곧 공정성이라 믿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공정성이라는 가면 덕택에 그야말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는 사안도 그대로 넘기기 마련이다. 정몽준의 지지철회야말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언론이라면 당연히 비판해야 함에도 한국의 언론은 이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던 것이다. 정몽준 비판은 민주당에 유리하고 한나라당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이런 게 과연 공정한 것인가?

{IMAGE1_RIGHT}논객을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판단을 내렸느냐가 아니다. 그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 진정성이 있는가, 그리고 왜곡과 조작이 있는가, 또한 그 판단의 결과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가, 바로 이런 점들을 따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리고 논객의 글에서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실을 조작한 부분이 발견된다면, 그때야말로 무서운 도덕과 공정의 칼을 휘둘러야 한다. 사소한 왜곡이라도 나오면 바로 시장에서 퇴출시켜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김민석을 죽이는 것이 노무현 당선이나 이문옥 당선에 유리하다 해서 사실확인이 되지도 않은 것을 끌고 나와 그를 죽이려하는 것이 바로 공정성을 해치는 일이다. 또한 득표에 유리하다 해서 근거도 없이 현 정부의 호남편중 인사를 100배 과장하는 것이야말로 공정성을 해치는 일이다. 공정성은 바로 이때 써먹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친 노무현 논객의 입장에서 글을 써나갈 것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해서 갑자기 그를 감시하기 위해 억지 비판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처음부터 그의 위치를 보고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가 내세운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개혁성, 그리고 그것을 증명해주는 그의 과거행적을 보고 글을 써왔기 때문이다.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내 스스로의 양심에 따른 판단을 내려 옳다고 믿으면 옳다고 말할 것이며 틀렸다고 믿으면 틀렸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특정 정당의 간부나 대표에게 밥과 술을 얻어먹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정보를 캐야하는 기자가 아니므로 인터뷰를 하지 않는 이상 만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이문옥을 지지했지만 이문옥의 표를 위해 없는 말 지어내어 김민석을 공격하면 그것을 막을 것이며, 그렇게 도와준 김민석이 그릇된 정치적 판단을 내리면 그를 공격할 것이고, 잘못의 정도를 가려야 할 상황이 오면 후단협을 김민석보다 질이 훨씬 떨어지는 놈들이라 욕할 것이며, 김민석이 끝까지 깽판을 놓으면 다시 그를 비판할 것이다. 내 판단 기준이 바뀐 것이 아니라 김민석의 정치적 행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양심을 판단의 기준으로 세운 논객의 공정성이다. 바보 노무현이 대통령 노무현이 되어도 내 글의 논조가 크게 바뀌지 않을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권언유착의 시대에 편향된 글을 써나가는 논객으로서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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