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성추행으로 피소된 최연희, 누가 살려주었나
[정문순 칼럼] 세상은 피해를 당한 여성의 고통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정문순   기사입력  2006/07/30 [14:26]
시간과 싸우는 괴물; 성폭력 피해자
 
성폭력으로 피소된 최연희 의원이 한동안의 칩거에서 벗어나 슬그머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사건 직후 쏟아지는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의원직을 버리지 않겠다고 고집부리고, 성추행을 음주 탓으로 돌릴 때부터 그의 복귀는 이미 예견된 일이다. 그에게 중요한 게 있다면 오로지 시간이었다. 사람들의 비난이 빗발칠 때만 조용히 입 다물고 기가 죽어지내기만 하면 나머지는 시간이 다 알아서 손을 써줄 것이었다. 욕을 밥먹듯 얻어먹을 때야 하루가 일 년 같아 죽을 맛이었겠지만, 더디 가도 흐르는 것이 시간이다. 세월 앞에 장사가 있으랴.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그만큼 절절이 깨닫고 있는 자는 없으리라. 
 
사람들의 망각에 의지하는 것만큼 간편하고 손쉬운 일은 없다. 최연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적을 잊으라고 강요한 적이 없으며,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반성 없는 가해자의 경우와는 딴판으로 피해자에게 시간은 결코 자기 편에 서지 않는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그날' 이후 시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죽어도 당시를 떠올리고 싶지 않은 피해자의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기억은 흘러가버린 과거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쇠귀신처럼 몸에 들러붙어 있다. 세월이 아무리 줄달음쳐도 몸은 모욕당한 당시를 잊어버리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생생히 떠올라 상처에 불을 붙이고야 만다.
 
시간의 손이 미치는 곳은 무엇이든 빛바래고 낡고 퇴색하여 무뎌지다 끝내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망각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존엄성이 뿌리째 거부당한 경험은 이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의 풍화작용까지 거뜬히 이겨내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기억 앞에 피해자는 무력하다.
 
나의 경우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을 훌쩍 넘어 어제 일어난 일처럼 실어 나르는 기억은 현재 속에서 과거에 붙들려 있는 분열 상태로 몰아넣었다. 앞날을 향해 나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소외감과, 과거를 현재처럼 살아가는 비정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성폭력 못지 않은 고통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시간의 흐름을 되돌리는 일이 가능할까. 흐르는 시간을 붙들고 있는 한 성폭력 피해자들은 곧 자연의 질서와 싸우는 괴물이거나 실체 없는 유령의 처지로 전락하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세상의 흐름에 뒤섞이는 범속한 일상에 이들이 끼어 들 자리는 많지 않다. 장마가 그친 뒤의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고, 더위 끝에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청량하다고 느끼는 정도의 여유조차 평범한 삶을 거부당한 자신이 누리기에는 사치스러운 것처럼 여겨진다.  
 
그에 반해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쉽게 잊어버리는 가해자는 세상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떵떵거리고 사는 가해자의 모습은 피해자에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고통을 강요한다. 물론 가해자는 피해자에 비해 권력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확률이 많다. 가해자가 과거의 일을 그리도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이 과거에 붙들려 있는 피해자 자신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가해자에게 망각은 어디까지나 일상의 평온함을 잃지 않은 정상적인 행동으로 비칠 뿐이다.
 
사회가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것 역시 가해자의 심성에 기울어져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연희가 언감생심 정치인 노릇을 재개할 마음을 먹도록 만든 건 그를 비난하기는커녕 되려 옹호하고 나선 정치인들과 그의 지역구 유권자들 덕분 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세상은 그에게 피해를 당한 여성의 고통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루 수십만 명이 찾는 포털 사이트들은 성범죄 기사를 간판뉴스로 즐겨 올린다. 개혁을 표방한 오마이뉴스의 독자게시판은 성범죄 정치인을 공격한답시고 피해자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 선정적인 글들로 넘쳐난다. 넘어진 피해자를 밟고 짓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는 가해자 못지 않게 피해자를 비정상의 처지로 내몰고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흐르더라도 있던 일을 없던 일로 뒤집어놓을 수는 없다면, 고통의 완전한 치유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은 가능할지 모른다. 오직 가해자의 진심 어린 반성과 응분의 처벌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가 괴물의 처지에 떨어진 피해자들이 평범한 일상인으로 복귀하도록 손을 내밀어 줄 것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6/07/30 [14:26]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조영숙 2006/07/31 [18:51] 수정 | 삭제
  • 국민들이 고통받는 시간에도 골프나치고 성추행이나 일삼고, 군사독재의 잔재들이 아직도 그득한 xxx 당은 왜 만날 승리만 할까요?
    우리 국민들의 머릿속엔 정사의 개념에 대한 사리분별력이 없어졌을까요?
    시험인간으로 키워진 젊은세대, 물질만능에 오염된 어른세대...그래서 최연희 같은 자들은 시간을 죽은자를 살리는 초월적 처방으로 굳게 믿고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