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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지지자들을 위한 노자 도덕경의 세계
[논술 도덕경 제8장] 젠더적 관점에서 박근혜는 남성, 강정구는 여성이다
 
신정모라   기사입력  2006/06/08 [15:12]
박근혜 지지자들에 대해 말하고자 하면서 도덕경 제8장을 연관시키다니 엉뚱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도덕경은 현실에 발딛고 사는 모든 생물체 행동과 그들의 사고방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박근혜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젠더학의 관점에서 여성계의 의견이 폭로되어야 할 시점이 이미 지나도 한참 지났다. 대중이 참아내기엔 너무 오래 침묵하고 있는 여성계.   

국가 젠더학의 한계점이 바로 이것이다. 국가가 여성학을 하고 있으니 지방 선거에서 싹쓸이를 한 거대 야당의 총수의 젠더를 국민이 헷갈리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박근혜가 젠더학 관점에서 남성이고 강정구는 여성이다"라고 단언한다.  

강정구 교수가 탄압 당하는 것은 여성이 핍박받고 있는 현상과 같다. 박근혜 대표가 추종받는 이치는 마초 남성이 영웅시되는 유교문화의 재확인이다. 보수 진영은 유교주의 마초가 대다수 인구를 차지하고 있어 남성젠더 마초 박근혜를 지지한다. 참진보는 박근혜를 지지할 리가 없다.   사이비 진보 중에 마초가 상당수 숨어 있다. 이게 문제이다. 이 사진마(사이비진보 + 마초)들은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독재를 비판한다는 허울좋은 기치하에 박근혜를 성적으로 비하하는 패러디를 즐겨 다루었다. 그 결과 대중여성들에게서 성적 수치심을 불러 일으켜 반발을 삼으로써 젠더 남자인 박근혜를 대중 여성들이 여성정치인으로 착각하고 같은 여자 입장에서  지지하게 만들었다.    

많은 여성들이 박근혜를 여성으로 오인하는 데 일조한 사진마들의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 표현은 오랜 기간 계속되었다. 일본 우익을 포함하여 독재시절 박정희 박수부대였던 여성단체협의회는 박근혜를 여성으로 인식하고 지지한다. 이건 세계사적으로 한 편의  코메디이다.

박근혜가 여성이었던 적은 딱 한번 '전자팔찌'를 제안했을 때 뿐이었다. 그 정도의 제안으로 여성으로 오해받는다면 강정구 교수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지만 완전히 여성 역할을 잘 해 왔던 사람이다. 박근혜의 가진 자 위주의 정책, 사학법투쟁,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가진 자들 감세정책, 성추행 의원 옹호하는 한나라당 남자 국회의원 결집시키는 행위, 부패정당 결집시키는 행위, 마초보수들의 기득권 지키기 정책, 친일행각 반성하지 않기 등 헤아릴 수도 없는 마초 행각을 곰곰히 짚어보자. 박근혜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싹쓸이는 영리한 게 아니라 사악한 행각이었다. 진실의 관점에서 그것이 결국엔 부메랑으로 돌아갈 것이고.    

부패정당으로서 한번도 국민의 심판을 받지 않았던 정당이 집권여당 심판론을 운운할 자격이 있는가 말이다. 선진국 중에서 한국만큼 가진 자들이 세금을 적게 내는 곳이 없는데, 또 부동산 투기가 이 정도로 심각한 곳이 없는데, 그런 부당한 악을 부추기는 한나라당이야말로 기득권 집단이기주의당으로서 진짜 심판받아야 마땅하다. 한국이란 사회가 건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 한나라당의 집단 이기주의 때문에 사회적 합의도출이 번번이 벽에 부딪쳤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고 있는가? 박근혜는 확실하게 박정희 독재 정신을 이어받은 마초남자이다.    

도저히 여성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마초 남성다운 역할을 해 온 박근혜가 여성이라고 우기는 것을 여성계가 방관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나는 도덕경을 언급하는 것이다. 여성계는 욕심을 버리고 진실을 보자. 지금 여성계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인가, 아니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인가? 박근혜는 확실하게 마초 남성이다.   

지방선거 결과를 국민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국민들이 자기 욕심만 차리고 사회가 어떻게 되든, 국가가 어떻게 되든, 내 이웃이 어찌되든, 우리 아이들이 어찌되든, 아집이라는 우물 안에 갇혀 딱 자기 집값 걱정만 하면서 표를 찍는데 어떻게 민주주의가 가능하며 정의가 가능한지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가진 자 위주, 강자 위주, 이런 식으로 마초 정신이 하늘을 찌르는 식으로 나가다가는 공멸한다.  

도덕경 번역에 여성학자들이 대거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성학자들이 번역한 도덕경은 형이상학적이고 남성 언어의 현학적 수사 때문에 어렵기만 할 뿐. 뭔가 늘 내용이 허전하다. 음과 양이 조화되는 법인데 여성 목소리가 너무 없는 한국 사회, 성매수범죄를 합법화하는 독일같은 문화후진국을 선진국으로 추앙하는 우를 범해 왔다.   

독일을 선진국이라고 칭하는 자들은 마초들이지 여성들이 아니다. 박근혜를 여성으로 착각하는 자들은 일본우익마초와 한국의 마초들이지 여성들이 아니다. 젠더학도 국가여성학에서 탈피하여 대중 여성계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여성계도 지방선거 싹쓸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며, 이 시점에서 박근혜에 대한 성정체성을 국민에게 분명히 밝힐 필요성이 있다.      

정치권의 국민사기극이 가능한 배경은 사회가 사상적으로 부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경 사상에 흐르는 욕심을 버리고 현실에 발을 딛고 진실에 눈뜨게 하는 정신구조가 한국 사회에 절실히 필요하다. 

노자  도덕경 제8장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상선약수. 수선이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오.

깨달은 상태는 물에 비유할 수 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물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욕심을 내면서 자기 욕망을 추구하지만 물은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깨달은 사람은 욕심이 없음으로 좋아하고 싫어하고가 없는 상태이니 물처럼 부드럽게 흐른다. 깨달은 사람이 높은 곳을 싫어하고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속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높은 곳 낮은 곳이란 의미 자체가 없으니까. 

노자(혹은 깨달은 성인들)가 도를 설명하기 위해 한참 고민했을 것이다. 가장 알아듣기 쉽게 말하려면 뭔가에 비유해서 거기에 의존해 개념을 심어주어야 할 텐데... 그런 고민 끝에 도를 물에 비유한 듯하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얼렁뚱땅 넘어가서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지만 과학적으로 따지면 이게 말이 되는 소리는 아니다. 노자처럼 비유를 하자면 욕심이 없는 모든 사물의 특징과 도의 상태는 같아진다. 그렇지만 사물의 특징이 도와 일치하는가? 비유적 표현은 어디까지나 비유가 될 뿐이지 똑같을 수는 없다. 개개인이 각자의 자기 경험에 비추어 도의 상태를 깨달아야만 한다. 노자는 한 편의 시를 쓴 것이다. 상징의 대가 노자, 위대한 시인이다. 

우리나라처럼 시인들이 술이나 마시고 자기 절제를 못하는 것을 낭만으로 여기며 담배에 중독되어 사는 생활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곳에서 노자의 시적 표현은 의미가 깊다. 

자기 절제가 안 되는, 자기완성에 대해 책임감이 없는 시인들의 시가 과연 완성도가 있을까? 뭐, 인생의 한 단면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생에는 단계 단계가 있는 법이니까. 생의 과정이 깊어지고 성숙해지고 완성되는 과정에서 언어가 생산되는 것이고.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고기어도. 거선지, 심선연, 여선인, 언선신,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부유부쟁, 고무우.

그러므로  도는 쓸모가 있다. (도는 형이상학이 아니다. 도덕경 언어가 도를 형이상학처럼 보이게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도는 현실을 사는 모든 생물의 지혜이다.) 도인은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 마음은 비워서 깊은 연못처럼 하여 지혜롭다. 깨달으면 마음이 평화로와 너그럽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 말에 믿음이 있다. 욕심이 없으면 모든 걸 올바르게 다스린다. 깨닫게 되면 마음이 우왕좌왕하지 않아 집중이 잘되어 일을 능률적으로 잘 해 낸다. (양궁선수들도 마음을 비워야 집중을 잘해서 과녁을 잘 맞출 수 있다고 고백한다. 도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삶의 지혜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통찰력이 생겨서 시기를 잘 알아 행동한다. 그렇게 하여 마음을 어지럽히는 다툼이 없다. 마음 속 다툼이 없으니 행복하고 지복을 누리며 고로 오류가 없다.  

참고로 노자의 도덕경이 인간이 욕심을 모두 버리고 맹물처럼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뜻의 메시지는 아니다. 인간의 욕심은 뭔가를 이룰 때 필요하다. 소망하고 열망하면 이루어진다. 노자의 도덕경은 인간의 욕심이 사람의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고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 불행하게 만드는 상태를 무지(지혜 없음)라고 말하는 것이다. 도덕경은 마음 에너지에 대한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욕심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차별하지 않는다.    

마음을 순수하게 관조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욕심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깨달은 상태, 지혜이다.  

인간이 마음(욕심)을 버린다고 해서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사로잡혀서 현상을 착각하는 것과, 마음 그 자체를 순수하게 바라보는 상태는 무지와 지혜의 차이인 것이다. 내자가  '조화주의'에서 언급했듯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곧 욕심을 버리면) 세상이  조화롭게 된다.  

* 참고 : 신정모라 도덕경 번역은 '공자를 울린 여자'에 수록된 조화주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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