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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원본> 출처, 안동 '긍구당가'로 밝혀져
[발굴] 건국대 박종덕 교수, 훈민정음 해례본 유출 과정 논문으로 입증
 
김영조   기사입력  2006/05/30 [13:26]
"1942년 훈민정음 원본이 안동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일본 사람들 몰래 소유자가 원한 물건값의 10배를 주고, 훈민정음 원본을 구입해 지켜낸 일일 것이다. 당시 간송 선생은 해방이 될 때까지 이 일을 절대 비밀로 부쳤는데 한글을 지키던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감옥에 가뒀던 일본총독부가 이를 알았다면 훈민정음 원본의 운명은 어찌되었을지 등골이 오싹하기까지 한다."

▲ <훈민정음>원본 (간송미술관 소장)                     © 김영조

위 글은 본 기자가 지난해 8월 19일 "일본총독부 눈 피해 '훈민정음' 원본 지켰다"라는 제목으로 <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이야기> 서평에 있는 글이다. 현재까지 <훈민정음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것이 유일하다. 단 한 권의 국보 제70호 훈민정음이 전형필 선생의 철학 덕분에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훈민정음의 출처가 어디였던가에 대해서는 그동안 의견이 분분했다. 기존의 설들을 보면 '안동 와룡면 이한걸 씨 집의 세전 가보이다', '경북 의성의 한 고가에서 발견되었다', '오구라 신페이의 위작이다', '이한걸 씨의 삼남 이용준의 처가일 것이다', '안동 와룡면 소재 긍구당가의 세전 가보이다'들이다.

이 중 이한걸 씨 집 세전 가보라거나 의성의 한 고가 발견설 등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들이다. 또 오구라 신페이의 위작이라는 주장은 려증동 교수가 주장한 것이며, 이용준의 처가설은 <한글 새소식>(제398호)에 현 한글학회 김계곤 회장이 주장했고, 긍구당가의 세전 가보라는 것은 역시 <한글 새소식>(제395호)에 박영진 교사가 주장한 것이다.
 
▲ <훈민정음> 원본의 출처 긍구당 전경                            © 김영조
  
그런데 최근 한국어학회지(31호, 2006년 5월)에 이를 수년간 연구하여 긍구당가 세전 가보임을 밝힌 논문이 실렸다. 논문은 건국대학교 박종덕 교수의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 과정 연구(학계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이다. 그가 얻은 결론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본 <훈민정음>은 광산 김씨 안동 종가 긍구당(肯構堂)의 세전가보(世傳家寶)였다. 둘째, 원본 <훈민정음>은 광산 김씨 안동 종가의 종손 김응수(金應洙)의 사위 이용준(李容準)에 의해 긍구당에서 유출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님이 소장하게 되었다. 셋째, 원본 <훈민정음>의 마지막 쪽 여백에 낙서처럼 된 것은 광산 김씨 안동 종가 긍구당 소장의 분재기(分財記)에 나오는 수결의 일부이다."

그가 밝힌 근거를 살펴보자. 그는 이용준이 장인 김응수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에서도 드러난다고 보고 있다.

"또 전번에 말씀드린 일은 저의 망령된 생각에서 나왔기에 분부를 받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가려 뽑은 책은 몇 분의 일에 불과하여 서가에 영향은 깊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반드시 깊이 애석해할 일이 아닙니다."

▲ 긍구당에서 발견된 분재기 앞면(뒷면에 수결들이 있다.)            © 박종덕 제공

 그는 이에서 이용준이 긍구당의 서가에서 책을 가려 뽑아 유출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그는 편지 다음 부분에서 유출한 서책의 매도에 열을 올렸다고 말한다.

"다시 거듭 황의돈 선생에게 요청하여 값을 90원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같으면 이것은 최고 가격인데 다른 곳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분부를 바라고 바랍니다. 이는 이해관계여서 천박한 것 같지만 또 지금 세상의 일입니다. 웃음으로 꾸짖지는 말아 주십시오. 서책이 운송되어 대금으로 바꾸어서 안동역 앞 운송부로 부쳐 보내면 피차 안전할 것입니다. 빨리 도모해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이를 보면 <훈민정음>을 이용준이 가져다 팔았다는 결정적인 근거는 아니다.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박 교수는 몇몇 사람의 증언으로 그를 입증하고 있다. 먼저 이용준의 둘째형 이용훈과 김응수의 손자 김대중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큰 역할을 한다.

"우리 가문의 자랑으로 우리 본가 보존이라고 했지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고 내 아우(이용준)의 처가 소유이다.(<보성>3호에 실린 현 한글학회장 김계곤 선생의 '훈민정음 원본 발견 경위에 대하여' 논문에서 인용)"

▲ <훈민정음> 원본의 유출자 이용준이 장인 김응수에게 보낸 편지     © 박종덕 제공

 "바로 이한걸 씨의 삼남 이용준 씨가 나의 고모부일세. 이 고모부 되는 이가 선전(지금의 국선)에 특선할 만큼 글씨도 잘 쓰고, 글도 잘했네. 그러므로 조부(김응수)께서 사랑하여, 오시면 책방에서 마음대로 책을 보게 하였다네.

그분이 이런 점을 기회로 훈민정음 원본과 매월당집을 가져갔네. .....내가 어릴 때 조부께서 고모부에게 '너 이놈! 공부한 선비가 남몰래 책을 훔치다니 다시는 내 집에 발걸음을 하지 말아라!' 하시면서 꾸중하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네"(김응수의 손자 김대중, 1991년 10월 18일)

김대중은 현재 고희를 넘긴 나이로 본 기자도 2006년 2월 긍구당가에서 김대중의 증언을 들은 적이 있다. 이때 김대중은 "내가 어렸을 때였는데 조부께서 고모부에게 '다시는 발걸음을 하지 마라!'라며 호통을 치던 일이 생각난다. 고모부는 눈물을 흘리며 집을 나갔는데 어린 나이에 나는 '고모부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기에 그렇게 매정하게 나무라시나?'라는 생각이 들어 조부가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모부가 엄청난 일을 저질렀더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이런 편지나 증언 외에도 수결로 <훈민정음>이 긍구당가의 것임을 증명해 보인다. 그는 긍구당가의 고서 더미에서 여러 장의 '광산 김씨 안동 종가 소장의 분재기'를 발견했는데 이 분재기의 수결과 원본 <훈민정음>의 33b의 난외에 있는 수결의 일부가 같은 것임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 긍구당가 분재기(왼쪽)에 있는 수결과 <훈민정음> 원본(오른쪽)에 있는 수결 비교 - 뜻 '의(意)'자로 마음과 같다는 의미이다.     © 박종덕 제공

 한편, 원본 <훈민정음>의 출처가 긍구당가임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로 그는 첫 두 장이 낙장(落張)된 사실을 들었다. 첫 두 장이 낙장된 까닭으로 흔히 '연산군 언문 탄압설'을 드는데 이는 뒷면에 필사된 '십구사략언해(十九史略諺解)'의 필사 연대가 18세기 전후의 일로 보이므로 연산군 때와는 시차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김주언(2005)의 주장이 있었다고 한다.

박 교수는 박영진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고 소개한다. "원래 소유자인 김대중 님 집안에서는 대대로 모든 책 첫 장에 장서인을 찍어 놓았는데 이 장서인을 없애기 위해 첫 장을 뜯었다는 전언이 훨씬 설득력이 높다."

▲ 대담을 하는 긍구당가의 종손 김대중     © 김영조
따라서 박종덕 교수는 원본 <훈민정음>의 출처가 긍구당가임을 명확히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긍구당가의 종손 김대중 씨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이다. 나는 지난 2월 긍구당을 방문했을 때 그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었다. 김대중은 이에 대해 분명한 의사를 밝혔다.

"물론 <훈민정음>의 출처가 우리 집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형필 선생이 그걸 밝혀주기 전에는 그렇게 소중한 책인지도 몰랐다. 우리 집에 계속 있었을 경우,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훈민정음>을 가져다 귀중한 책임을 알리고, 잘 보관해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인제 와서 굳이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진실을 알아달라는 것뿐이다.”

<훈민정음>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의 한문해설서로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훈민정음>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현재 서울 성북동 소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 간송미술관에서는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특별 대전(5월 21∼6월 4일까지)을 열고 있으며, <훈민정음> 원본도 전시 중이다. 주말에는 관람 인파로 한 시간씩 줄을 설 정도인데 간송 선생의 우리 문화재에 대한 끔찍한 사랑이 세상에 알려진 탓일 것이다.

▲ 간송미술관의 전형필 선생 흉상     © 김영조
전시회를 본 사람들의 아쉽다는 말들이 들려 온다. "<훈민정음> 원본을 비롯해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소장돼 있는 간송미술관이 이렇게 작고, 허술하다니 놀랍다. 정부에서는 왜 이런 곳에 지원을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 최고의 보물, <훈민정음> 원본이 소장된 가치를 봐서라도 정부의 지원은 정말 아쉽다."
  
<훈민정음> 원본의 출처에 대해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에게 확인해 보았다. "나는 간송 선생을 직접 본 적도 없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서 뭐라 말할 수 없다. 다만, 학자들이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고, 전문적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지금 이야기되는 출처는 충분히 사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 기자는 <훈민정음> 원본의 유출자인 이용준에 대해 확인해 보았지만 그는 북한으로 넘어가 활동하다가 지난해 세상을 떴다고 전해진다.

이제 <훈민정음> 원본의 출처는 박종덕 교수의 노력과 한국어학회의 여섯 달에 걸친 엄정한 심사로 분명히 밝혀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박 교수는 문화재 기록에 원본의 출처를 분명히 하고, 긍구당을 문화유적으로 지정하여 세계에 알릴 문화콘텐츠로 가꿔 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다.
 
긍구당가를 세계문화유산 훈민정음 마을로 지정해야
[대담]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 과정 연구 논문을 발표한 박종덕 교수

▲ 논문 집필자 박종덕 교수
- 어떻게 훈민정음 출처 연구를 하게 되었나?

"2000년 4월 긍구당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6호로 지정되어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수리가 진행되었다. 그래서 그곳에 살고 있던 김대중 님이 긍구당 서고 정리 작업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편지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긍구당은 나의 친구 집인데, 그 집을 나의 친구인 박영진 교사(부산 동래여중)와 함께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평소 문헌 자료에 관심이 많았고, 박 교사는 한문에 능통하였기에 김대중 님이 보여 준 이 자료가 예사롭지 않음을 확인하고 판독하였다. 판독 결과 이 자료는 원본 <훈민정음> 유출과 관련한 자료이며, 훈민정음 해례본의 출처에 대하여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들과 다른 사실을 보여 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때부터 훈민정음의 출처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 긍구당에 훈민정음 말고 또 다른 희귀본 고서적이 있었나?

"국어국문학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될 여러 권의 희귀본 고서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목록을 현재는 밝힐 수 없다. 그리고 현재 긍구당에는 소장되어 있지 않다. 언젠가 이에 대한 연구가 마무리되면 밝히게 될 것이다."

- 이용준의 형, 이용훈의 증언은 결정적인데 이는 신빙성이 있나?

"<보성>3호(1964년 1월 15일, 보성중고등학교 재건학생회 발행, 고 간송 선생 추도 특집호)에 역시 <훈민정음> 원본 출처 연구를 한 현 한글학회장 김계곤 선생의 ‘훈민정음 원본 발견 경위에 대하여’라는 논문이 실렸는데 여기서 인용했다. 이는 김계곤 선생이 이용훈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 통화를 한 것으로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긍구당이 훈민정음의 출처라고 본다면 장차 긍구당가를 어떻게든 세계적 문화콘텐츠로 만들어 나가야 할 텐데 이에 대한 구상은 가지고 있나?

"훈민정음 해례본의 출처인 긍구당가를 세계문화유산 훈민정음 마을로 지정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이미 한민족문화학회에서 발표한 바가 있다. 긍구당은 세계문화유산 훈민정음 마을이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구상은 이미 대부분 마친 상태이다. 지금은 학계 및 관계의 여러 전문가와 깊이 있는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 있다. 조만간 실현 가능한 계획이 나올 것이다."

- <훈민정음> 원본의 출처가 긍구당임을 밝히고 난 소감을 말해달라.

"논문이 <한국어학>(학술진흥재단의 등재지)이라는 권위 있는 논문집에 수록된 것은 학계가 <훈민정음> 원본의 출처가 긍구당임을 인정한 것으로 본다. 다만,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간송미술관에 누가 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간송 선생은 평생을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신 분이다. 그리고 현 간송 미술관의 관계자도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바람이 있다면, 훈민정음 해례본의 출처가 긍구당임을 간송미술관에서 명확하게 밝혀주길 기대할 따름이다. 간송 선생님이 계셨다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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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5/30 [13:2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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