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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여성학의 관점에서 본 노자 도덕경의 세계
[논술 도덕경 제6 - 7장] 자연과 교감, 참 자기 터득하면 세상이 조화롭다
 
신정모라   기사입력  2006/05/04 [07:04]
도덕경 제6장

谷神不死, 是謂玄牝.  (곡신불사, 시위현빈)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綿綿若存, 用之不勤.   (면면약존, 용지불근)         

1) 자궁(여신, 생명탄생지의 상징적 표현)은 죽지 않으니 영원한 생산처다. 여성은 생명을 이어간다. 가부장제는 인위적인 제도이다. 모계가 무위사상에 근거한 자연 법칙과 조화된다. 시적인 비유적 표현이므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이 장은 동양 여성학에서 적극적으로 토론해야 할 문구이다. 

2) 생산의 문은 천지(도)의 근원이다.     
 
서양과 동양 철학은 진리 접근 방식이 다르다. 서양철학은 진리라는 산을 올라가며 자세한 길목을 묘사하고 올라가는 방법을 논의하면서 더 정확하고 상세한 설명으로 발전시킨다.  서양 철학은 발전하면서 산이 점점 높아진다. 동양 철학은 산을 올라갔다 내려와서 전체적인 산을 묘사한다. 발전하면서 서양철학처럼 더 상세한 설명과 정확함을 추구하지만 서양철학처럼 산을 점점 높이지 않고 반드시 내려와 자연과 하나된다. 자세한 걸로 따지면 아직  동양이 서양을 따라갈 수는 없다. 진리에 대한 직관적인 통찰과 전체적인 방향성으로 봐서는 동양이 더 완성적이다.    
 
한국 여성학 계통의 주류는 서양철학하는 방식을 택해 왔다. 언어 사용 방식이 완전히 다른 동양철학과의 접목이 필요하다.       

3) 면면이 이어지는 듯하다. 도는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용되어 영원하다. 생명이 생사를 반복하면서 영원히 계속되는 것처럼. 
 
 
해석 : 도(道)란 영원한 생산의 근원과 같다. 생명이 탄생하고 죽는 것은 천지의 근원이다. 자연법칙은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작용하는 원리이다.  

참된 깨달음의 경지는 자연과 하나되어 영원하다. 감각세계에서 인지되는 현상학적 세계관은 헛된 것이다. 무엇하나 지속됨이 없이 사라져 버리는 허망한 것이다. 생명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처럼 참된 실체는 사라지지 않고 자연과 하나되어 영원하다. 육체나 감각을 '나'라고 인식하지 않는 순간 진정한 나, 실체를 터득한다. 이런 경지는 살고 죽음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영원할 수 있다. 감각으로 인지하는 '나'가 죽음으로써 새로이 실체로서의 '나'가 깨달아지는 것이다. 이 실체는 처음부터 계속되어 온 생명 현상처럼 자연과 하나이다.    
 

도덕경 제7장  - '참 자기'를 터득하면 세상이 조화롭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천장지구   천지소이능장차구자   이기불자생  고능장생)
 
자연(천지)은 장구하다, 천지자연이 영원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 고로 능히 영원하다.  
 
세상을 움직이는 자연법칙은 가변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장구하다.   
 
是以聖人 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시이성인 후기신이신선   외기신이신존)
 
성인은 자기 욕심을 뒷전에 두어 자연법칙대로 살기에 지혜로워서 참 자신이 앞서게 된다. 자기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밖으로 버림으로써 '참 자신'를 보존하게 된다. 
 
'참 자신'이라는 것은 앞 문장에서 언급한 천지자연의 법칙과 통하는 지혜를 터득한 자아이다. 여기 4군데 쓰여진 身은 위치에 따라 뉘앙스와 뜻이 다르다고 봐야 한다.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비이기무사사, 고능성기사)
 
사심, 아집, 욕심 등 참 자기를 깨닫지 못하게 방해하는 에너지를 없애어 자유롭게 됨으로써 능히  '진정한 자기', 즉 자연법칙에 도달하는 것이다.  
 
앞 문구의 私와 뒷 문구의 私는 다르다. 앞의 것은 생각에 사로잡힌 자기이고 뒤의 것은  욕심을 버린 뒤에 신경생리학적으로 마음이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존재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깨달은 자기이다. 
 
도덕경에는 같은 한자라도 관념이 다른 것으로 사용되는 한자가 자주 등장한다. 이런 문구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도덕경이 역설의 진리, 신비의 진리로 오해받는 경향이 있다. 도덕경에는 신비도 없고, 역설도 없다. 깨달음을 향한 수행법과 깨달음의 경지에서 나온 참된 지혜에 대한 설명들로 구성되어졌다.   
 
 
해석 : 신비라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고 마음의 황홀경을 뜻한다. 마음 에너지는 생각이 존재하는 상태이며, 아집·욕심과 별로 크게 다르지 않다. 고로 마음을 버린 깨달음 경지를 설명하는 도덕경은 신비한 진리가 아니라 단순하고 간단한 진리이다. 신비한 진리라는 것은 마음이 작용해서 만들어 낸 망상이다. 성경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흔히 등장하는 '역설적인 비유법'이란 용어들도 정확한 건 아니다. 역설은 없다. 언어가 '참 자아'를 설명하기 어려워서  역설적이란 용어가 생긴 것이다. 비트겐쉬타인 언어에서 더 상세히 들어가 마음을 없애면 역설적인 진리란 없다는 자연법 그대로의 진리에 비로소 도달하게 된다. 비트겐쉬타인은 소프트웨어내에서만 문제 해결을 도모했기 때문에 마음을 버린 게 아니라서 노자의 진리와는 거리가 있다. 진리탐구를 하는 방법론면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다.
 

도덕경을 설명할 때, '신비 혹은 역설적이다'라는 흔한 표현들은 언어의 미발달과 마음을 비우지 않고 마음으로 쓴 언어가 만들어낸 오류에서 비롯된다. 도덕경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동양철학의 미발달을 인정하기는 싫고, 설명은 해야겠고 이런 학계의 배경에서  도덕경이 신비로운 진리이니 역설적인 설명법을 사용했다느니 하는 학자들의 변명이 탄생되어 온 것이다. 동양철학도 결국 언어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니 서양철학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쑥스러워서 이 문제를 피하고 있다.
 

동양철학은 심오하고 서양철학은 현상만을 다룬다는 편견도 우습거니와 언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증상에서 비롯된 문제점들을 뭉뚱그려 '신비'니 '역설'이니 하는 말로 종결시키는 학계의 관행도 또한 문제이다.     
 

한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면, 신경생리학적으로 동양철학을 설명해 내려는 노력이 이 언어의 한계 문제를 어느 정도 보완하리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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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5/04 [07:0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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