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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이후 40년, 타락한 대구정신 2·28 의거
[탐사] 수구기득권이 장악한 2·28 기념사업회, 노망든 횃불을 내려라!
 
서태영   기사입력  2006/03/18 [20:09]
아! 내가 어떻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운명을 예견할 수 있었겠는가? 그 운명에 내맡겨진 지금가지도 어떻게 그것을 납득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상식으로는 아직도 예전과 다름없는 존재인 내가, 의심할 나위 없는 괴물로, 또 독살자로, 살인자로 알려지고 취급당할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어찌 인간 혐오자나 사람들의 노리갯감이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행인들이 내게 던지는 인사가 침 뱉는 것이며, 한 세대 전체가 나를 생매장시키는 데 한 통속이 되어 즐거워하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뜻밖의 이상한 변화에 직면한 나는 우선 혼란에 빠졌다. 나는 불안과 분노 때문에 미칠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그것을 진정하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동안 나는 신중하지 못해서 실수와 잘못, 어리석은 짓을 거듭했다. 그것은 내 운명을 좌우하는 자들에게 내 운명을 돌이킬 수 없도록 교묘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용하는데 편의를 제공한 셈이었다.   <루소, 『어느 퇴출자의 명상』(김정곤 옮김) 10-11쪽>

이제 그만, "횃불을 내려라 노망의 빚들아!"

오늘 대구가 자랑하는 두 개의 역사는 곡필로 엄발났다.1)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이 그랬던 것처럼 대구가 자랑하는 2·28도 고리삭았다.2)

1960년 2·28. 그 날은 아득하고 세월은 끔찍하다. 소년에서 늙정이로 변한 2·28 형아들은 '이 순정코도 용감한 항거'(유치환)를 막베먹었다.3) 채 반세기가 흐르지도 않았건만 2·28은 육순 동년배들의 분별 없는 처세로 말미암아 2·28은 눈총을 받는 반운동의 대명사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대접받는 어른이 되어보겠다는 욕심에,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대구로 모셔서 민주화운동에 넣어달라고 로비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법률 정의 난에 2·28 학생의거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함세웅 이사장은 정신 바짝 차리고 2·28을 과거사 진상규명하듯 실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2·28 기념사업회의 타락상은 경북대학교 최용호 부라퀴의 과욕에서 비롯되었다. 수십 년 동안 2·28을 챙겨온 장주효 초대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그가 98년 2월 기념사업회장으로 취임하고 난 뒤, 데억지게도4) 동지회 수준의 기념사업회를 민주운동사업회로 전환하면서 짜발량이5)로 만들어버렸다.

그 확대사업의 주된 내용은 대통령과 대구시장에게 빈대 치겠다는 의지를 노골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옛 중앙초등학교 부지 위에 시민사회단체가 집요하게 싸워서 얻어낸 공간에 소도둑놈들처럼 깃대 꼽고 대통령 속이고 시장 이 된6) 친구빽 동원해서 강탈해간 집단 아닌가. 동성로 조폭도 이런 짓에는 엄두도 내지 않는다.

여기에 2·28 당시에 어떤 일을 했는지 행적이 아리송했던 홍종흠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편찬위원장7)은 무슨 염치로 2·28 학생의거를 지나치게 미화해 3권 분량의 민주운동으로 뻥튀기 했을까.

외람되게도 나는 『패배자의 회고록』8)에 나오는 "이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이상이 갖고 있는 사상을 위해 죽을 수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며, 정치라는 것은 우리가 그 사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때 존재한다"는 샤를르 페귀의 말로  표리부동했던 당신의 언행을 후벼파고 싶은 심정이오.

또한 취임 일 성으로 "민주화 기념사업회법을 개정토록 하여 4·19 가 대구의 어린 학생들에 의해 촉발됐다는 사실을 후세에 널리 알리도록 하겠다"고 했던 김정길9) 당신께서는 시민운동을 얼마나 얕잡아보면 그 따위 「2·28 민주의거의 이념과 시민운동」이라는 엉터리 논문 흉내를 내셨냐고 면박 주고 싶소.

자신의 손으로 쓴 칼럼집에 2·28 한번 거론해 본 적이 없는, 존재 그 자체가 이제는 매일신문사 명예주필이 아니라 대구의 '멍에주필'이 되어버린 그는 46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2월 27일치 수암 칼럼에서 「정동영, 2·28을 아는가」라는 글을 썼으나, 내용은 비유가 적적하지 못한 수암(秀癌)투였다.

2·28기념사업회 공동의장이 된 당신께 "경북고는 학기말시험을 치게 하고 대구고는 난데없는 토끼 사냥을 보내고 사대부고는 임시수업, 대구상고는 졸업생 송별회를 급조했다"10)는 문제 투성이 칼럼을 읽으면서 2·28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지 묻고 싶다.

길거리에서 피 터져 가며 싸워보지 않았다면 사실관계라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소.

2·28정신이 길이 전승되기를 바라는 2·28세대의 꿈이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침묵을 지키던 한국 학생운동의 복원'이라는 기분 좋은 평가가 따르던 2·28의 주역을 자처하는 그 주변부 인생들과 함께 노망들었다.

어디 갖고 놀게 없어 역사를 갖고 노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대구시민의 자랑거리에서 그들만의 역사로 입찬11) 2·28을 톺아보자.

시민단체마저 농락한 2·28기념사업회

헌책방에서 만 원 주고 산 『2·28 민주운동사』를 열심히 보았다. 1960년 9월 30일 초등학생 300명이 시위행진을 하는 빛바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대구는 그랬다. 지금은 그 혼을 어딘가에 빼앗겼나 보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에 강제 등교한 경북고등학교 선배들은 우리가 '체념할 수 없는 이유'를 아로새겨 놓고 생활전선으로 돌아갔다. 자기시대를 집단적으로 성토하고 뿔뿔이 사라졌다.

그때 순수열정으로 어깨동무하고 교문을 박차고 나와, 대구거리를 자유로로 만들어버렸던 정의의 형아들은 조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자기시대와 더불어 사라졌다.

자선을 베풀 때나 의로운 일을 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12)이라는 믿음의 영웅행각을 보였던 것이다.  

그새 이상한 형아들이 주인행세를 하며 나타났다. 그래 '씨를 뿌리는 사람은 당신들이었고, 그 열매를 따먹는 자는 다른 사람'(셀리)이었다. 평판 좋은 인사들을 끌어들여 오래된 신문을 뒤지고 사료들을 챙겨 민주운동 족보를 급조했다.

노욕의 산물로 보이는 2·28기념사업회를 생각하면 불경스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천사를 닮으려는 사람은 짐승을 닮게 된다."

파스칼의 『팡세』 <사고의 존엄> 편에 나오는 경구이다.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2·28기념사업회의 얼굴은 놀랍게도 짐승의 얼굴이다.

사건 발생 당시만 해도 신문지면 2쪽을 넘지 않았던 2·28은 몇 권의 두꺼운 책으로도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부풀어났다. 2·28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편찬분과위원장 홍종흠씨의 편찬사에서 무지와 함께 뻔뻔함을 느낀다.

"한국학생운동사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학생운동이 2·28로 완전복원되었다"13)는 조동걸 교수의 논지에 대한 명백한 오독이 아닌가. 

「…… 2·28민주운동은 4·19민주운동을 이끌어내고 6월 항쟁의 승리를 가져오는 등 역사 발전의 저류로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특히 대구지역은 이 2·28의거로 인해 건국이후 최초의 국민적 민주운동의 발상지로서 긍지를 가지게 됐음……」(홍종흠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편찬분과위원장, 『2·28민주운동사』14))

편찬사는 소증사납다.15) 현장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현세대 학생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 데모에 자주 참가하여 데모한 행위를 다반사로 알고 있었다"16)는데, 건국이후 최초의 민주운동이란다.

대구·경북 근·현대사연구회의 「2·28대구학생시위」를 보면 '2·28이 건국 후 최초의 민주주의운동'이라는 주장은 단번에 거짓말로 들통난다.

학생들은 1957년에 들어서면서 서울대의 이승만 양자 이강석의 부정입학에 대한 동맹휴학, 홍익대의 부실재단 철거 요구, 성균관대의 재단부패 규탄결의 등 학원의 민주화투쟁을 벌여나갔다.

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서울대 문리대의 신진회, 서울대 법대의 신조회, 고대 법대의 협진회, 부산 지역의 암장 등 소규모 이념 써클들도 결성되어 갔다.

마침내 2·28은 '경고생 데모'에서 '민주운동'으로 성격이 바뀐 대구정신의 '정치적 표상'으로 추켜세워진다. 가장 비정치적인 구호로 문제되지 않은 2·28 학생의거가 어떻게 정치적인 면에서 대구를 대표하는 정신적 위상을 갖게 되었는가?

"대구학생데모 사건이 아무 후환 없이 '파인플레이'로 끝난 것은 다분히 시기적인 우연성과 정치성이 없다는 순수한 동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남욱)이라던 2·28은 감당하기 힘든 정치적 무게가 실린다.

2·28정신은 지자체시대를 맞아 대구·경북의 시민정신으로까지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물론 이를 위해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진취성과 과단 성등은 앞으로 전개될 지방자치시대를 위한 시민정신으로 갖춰야 할 덕목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도 2·28은 대구·경북의 시민정신이 되어야 하고 대구·경북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도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제적 측면에서는 국채보상운동 정신으로, 정치적 측면에서는 2·28정신의 대구·경북을 대표하는 정신적 위상을 갖게 될 것이다.17)

뜻은 좋으나 국채보상운동과 2·28이 대구의 정신을 표상한다는데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두 기념사업회부터 정화해놓고 대구정신으로 자리 매김 해도 늦지 않으리.

우리야말로 2·28기념사업회에 "썩을 대로 썩어빠진 기성사회 낡아빠진 세대의 흙탕물이 젊고 맑은 우리의 피를 더럽히고 있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18)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아무 관련성도 없는 옛 중앙초등학교 부지를 2·28의 흔적이 서린 곳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중앙청소년공원을 2·28 민주기념공원으로 약탈했다.

기념사업회가 옛 중앙초등학교 자리에 세워지기로 되어있던 중앙청소년공원을 2·28기념중앙공원으로 이름을 바꿔치기 해 강탈해간 사건은 시민사회운동을 능멸하고 2·28정신의 몰락을 자초한 사건이었다. 거기가 어디인가?

2·28 기념사업회 공동의장이었던 문희갑 전 시장이 중앙지하상가재개발 사업을 불법 민간투자사업으로 강행한 비리의 현장 아닌가. 떳떳하지 못한 방식으로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으면서 기념사업을 추진한 사업회는 2·28 정신을 좀먹은 집단이라고 지탄받아 마땅하다.

2·28기념사업회 홍종흠 공동의장은 한술 더 떠 2001년 2월 22일치 매일신문에 "그리고 의거 당일의 역사적 자취가 배인 대구시내 구 중앙초등학교자리에 2·28공원 조성 기공식을 그 날에 맞춰 가지게 된 것은 인근 국채보상공원과 함께 대구가 자랑하는 2대 정신적 지주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내일 출범하는 2·28 민주포럼은 2·28공원이나 2·28교육과 표리를 이루면서 2·28정신을 현시점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실현시킬 것인가를 논의하는 광장으로 만들려는 것"이라며 시민사회를 현혹시켰다.

그런데도 지역분권과 지역혁신을 기치로 내건 대구사회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분권과 혁신』 2001년 5월호에 홍옹의 글19)이 버젓이 실린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대구사회 혁신역량 수준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기념사업회가 발행하는 횃불홍보지 7호(2002년 9월)에서 기획특집으로 준비한 「2·28기념공원의 상징성과 활용 방안」이라는 난에 글을 실은 시민운동가들을 보면서 대구병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았다.

수구세력들에게 포섭되어버린 시민사회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심지어는 락음악하는 저항아들까지도 '빼앗긴 공원'에서 2·28기념사업회의 치어리더 노릇을 하고 지랄이다. 

다만 시민운동을 하는 분들로 편찬분과위원회에 이름을 올린 2·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의 편찬위원 애바리20)들은 참회를 했으면 좋겠다. 시민운동이나 열심히 도와줘도 손이 모자라는 형편이다.

역사 사유화에 골몰하고 있는 2·28기념사업회에 대한 적절한 비판과 엄밀한 검증 없이 2·28을 대구정신으로 앞세우는 주장은 엄펑스럽다.21)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허튼소리다.

심지어 2·28기념사업회에 몸담고 있는 시민사회단체 인사들도 꿀 얻어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봉하고 있었다니 대구정신이 혼절해버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28을 죽여야 대구역사가 산다! 정신은 살리고 깃발은 내리고...
 

미  주
1) 엄발나다 :빗나가는 태도가 있다.

2) 고리삭다 : (젊은이의 말이나 행동이나 모습이) 맥이 없이 활발하지 못하거나, 건강함이 없이 아주 늙어 보이는 상태에 있다.

3) 막베먹다 : 가지고 있는 밑천이나 물건을 함부로 잘라서 쓰다.

4) 데억지다 : 정도에 지나치게 크거나 많다.

5) 짜발량이 : 짜그라져서 못 쓰게 된 물건

6) 2·28세대로 2·28을 대구정신이라고 추켜세우는 조해녕 대구시장은 경북고등학교 42회다. 2·28세대는 2·28정신을 저버리고 4·19를 총칼로 짓밟은 박정희 체제에 빌붙어먹었다. 2·28세력의 의식은 민주주의를 논할 정도로 옹골차지 못했다.     

7) 60년 2월 26일「2월 28일 하오 1시 등교에 관한 일」로 학생위원회가 열렸을 때 사회자였던 그는, 경북고등학교 42회 졸업생으로 매일신문 논설위원을 거쳐 2·28 기념사업회 3대 공동의장을 지냈다. 현재 대구문화예술회관장으로 재임하고 있으나, 그가 문화예술회관장을 할 자격을 갖췄는지에 대해서 문화예술계 내부에서는 뒷말이 많다

8) 미셀라공, 『패배자의 회고록』(이재형 옮김), 도서풀판 예하(1992)

9) 매일신문사 논설위원을 하다 문화예술회관장을 역임했다. 강당에 주저앉아 “우리는 비겁하지 않다”며  학내 데모를 했던 경북사대부고 출신의 그는 현재 2·28 기념사업회 뺑뺑이 공동의장이시다.

10) 두 군데가 틀렸다. 경북고는 애당초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가 영화관람을, 사대부고는 청소 뒤 재미있는 게임을 한다는 이유로 등교를 지시했다. 『2·28민주운동사』 를 한번 읽어보기라도 했는지 의심스러우면 김정길 공동의장은 1권 사론편 93쪽을 확인하시기 바란다.  

11) 입차다 : 자랑하다.

12) 『공동번역성서 개정판』마태오복음 6장 3절(대한성서공회)

13) 조동걸, 「2·28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오늘의 반성」, 『2·28민주의거 37주년 기념문집』 (1997)에 발표된 이 논문은 「기념사업회 관계문헌」 55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14) 이 책은 총 3권으로 1권 사료편, 2권 자료편, 3권 기념사업회 관계문헌을 수록했다.  2000년 2월 28일 발행했다. 당시 매일신문 논설위원이었던 홍종흠씨가 편찬위원장을 맡았다. 부위원장은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김태일교수가 부위원장과 집필위원으로 맹활약했다. 집필위원 김태일, 윤순갑(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오창균(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강사), 김일수(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강사)의 손으로 2·28민주운동의 사론을 완성했다. 이들은 2·28학생의거를 2·28민주운동으로 바꿔치기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2·28기념사업회는 공원을 갈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속단은 금물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청년기를 지나 한참일 무렵 수구골통으로 훼절한 경우를 제법 보았다. 아무리 운동권이 각광받는 세상이라고 하나 반나절 복작거린 것 들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문을 두드리는 것을 보면서 2·28기념사업회는 참 배알도 없는 수구꼴통집단이라는 서글픔을 금치 못한다. 덕분에 2·28 공부 하는데 큰 도움 받았지만, 수구세력 청산하겠다는 분들도 이집저집 넘나들다 폐가망신하지 말고 한 자리를 지켰으면 한다. 경거망동하다가는 수구세력에게 악용당한다. 아직까지 대구시민사회의 힘은 수구보수집단의 문패 아래에서 전세살이를 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지 않은가.

15) 소증사납다 : 하는 짓의 동기가 좋지 못하다.

16) 남욱 당시 매일신문 문화부장, 「2·28 대구학생 '데모'사건의 진상」 자료집 2권 196쪽

17) 「매일신문」 1999년 2월 27일 사설이다. 사설의 집필자는 홍종흠 씨로 추정된다. 그는『2·28민주의거 기념문집』(1997)에서「2·28을 대구정신으로 계승하자」는 주장을 폈다.   

18) 『2·28민주운동사』 자료집 3권, 362쪽

19) "건국 이후 민주화 운동의 효시가 된 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올해부터 대구지역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해서 가르치게 된 것은 자라나는 세대에 민주정신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키려는 사업"이라는 허위 사실이 기록된 매일신문 2002년 2월 22일치 「세풍-2·28, 분권의 횃불 밝히자」

20) 애바리 : 재물과 이익을 좇아 덤비는데 재빠른 사람 

21) 엄펑스럽다 : 남을 속이거나 골리는 품이 보기에 엉큼하다
* 글쓴이는 대자보 편집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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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3/18 [20:0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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