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시청자는 "한마디로 한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심야 쇼프로도 아니고 황금시간대에 전국민의 시청권을 빼앗으면서까지 마련된 대선후보를 검증한다는 자리에서 기껏 노상방뇨, 양다리 운운하니 우리 정치권과 연예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 프레시안
어제 이회창 캠프는 천 만명 이상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대중스타 혹은 대중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검증받았다. 물론 이회창 캠프에서는 자신들이 검증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그것을 알았다면 'TV 토론 청년 100인 이회창 후보를 검증한다’를 기획한 책임자를 분명히 문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의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지역대결구도를 세대대결구도가 압도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집권당의 후보로 영남출신 노무현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지역구도는 더욱 흔들릴 것이다. 만약 한나라당이 이판 사판식으로 지역대결로 몰아가겠다면 모르겠만, 젊은 세대의 표심을 잡아보겠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선거 전략을 대폭 수정하는게 좋을 것 같다.
물론 나는 이회창 캠프의 선거운동을 도와줄 생각은 없다. 내가 하라고 해서 그쪽에서 귀라도 기울여주겠는가? 그보다는 그래도 국민의 40% 가까운 지지율을 받고 있는 원내 제 1당의 후보로서 이 수준의 선거운동을 한다는 것은 국가적 망신이자 국력 낭비가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호소해볼 뿐이다.
더구나 혹시라도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했을 때, 젊은이들의 감수성 혹은 대중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현 수준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국가적 비극이 될 수밖에 없으니 지지 후보에 상관없이 지적할 것은 지적해주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여러 언론에서 보도되었듯이 한나라당은 이회창 대세론에 힘입어 연예계도 평정한 듯하다. 지난 11월 6일 열린‘직능특위 예술인 홍보단’ 발대식에 연예인과 문화예술인 8백여명이 참석했을 정도이다. 지지 연예인들의 면모도 사미자·양택조·한진희·임채무·전원주·박 철·김나운(탤런트), 구봉서·배삼룡·배일집·배연정·이용식(코미디언), 심현섭·강성범(개그맨), 현 미·한명숙·김수희·설운도·신성우·박상민·탁재훈(가수) 등 화려함을 자랑한다.
명계남과 문성근을 주축으로 한 영화인들 몇몇이 자발적으로 선거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노무현 쪽과 비교해본다면 벌써 양적인 측면에서 다르다.
선거에 대중스타를 참여시키는 이유는 간단하다. 스타 한 명이 동원할 수 있는 팬동원력이 막대하기 때문에 대중 스타 한 명만 잡아도 수만 명의 팬을 자신의 지지자로 돌릴 수 있다는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딱딱한 정치인의 이미지를 스타들의 친근함으로 포장할 수 있다는 장점 또한 고려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한 산술계산 대로 득표 공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연예인 스타 800명을 모았고, 각 스타 800명이 1만명씩의 팬 동원력이 있다고 해서 800백만표가 나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현대의 시청자들은 브라운관에 비친 스타의 모습에서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기획한 'TV 토론 청년 100인 이회창 후보를 검증한다'는 언론보도에 따른다면 젊은층에 대한 이회창 후보의 이미지를 재고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기획에 맞추어 김건모, 이창훈, 김대희, 탁재훈, 이세은 등 연예인 스타를 대거 토론회 패널로 참여킨 모양이다.
그러나 한번 곰곰이 따져보자. 그 자리는 제목 그대로 이회창 후보를 검증하는 자리이다. 그런데 이미 언론을 통해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다고 알려진 스타들을 대거 패널로 참여시켜 검증하겠다고 그러면 누가 믿겠는가? 그 자리에 연예인 자신을 지지하는 스타 박수부대를 동원한 것 자체가 이미 진지한 검증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리고 현대의 시청자들은 그 정도는 충분히 간파한다. 어디 장사 한두 번 해보나? 대통령 선거만 4번째 경험하는 시청자들이 수두룩하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연예인 스타들이 이 자리에서 무엇을 했는가?
1. 연애할 때 양다리 걸쳤어요? / 김대희 2. 주량은 얼마나 되세요? / 김준호 3. 스트레칭 좀 보여주세요? / 이창훈 4. 어떤 가수가 제일 좋으세요?/ 김건모
대한민국의 연예인들이라면 흔히 방송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서 히히덕거리는 그 말장난을 이회창 후보 검증 토론회에서 그대로 반복했다. 혹시 이러한 비판을 연예인들의 말장난에 대한 편견이 깃든 고루한 생각이라 하찮게 여긴다면 그 자체로 한나라당 캠프는 가망이 없어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스타의 정치참여가 어떠한 매커니즘을 거쳐 실제로 팬동원까지 이어지는지 전혀 모른 채 800명이라는 연예인을 맹목적으로 끌어모았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실탄만 많으면 뭐 하나? 총 쏠 줄 아는 포수가 없는데.
스타는 실제로 정치에 뜻이 있어서 정치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지만 단지 자신도 올바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소박한 욕구에서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더 많다. 팬의 입장에서도 항상 오락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즐겁게만 해주던 스타가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부분 흐뭇해 하기 마련이다.
탤런트 김혜수의 팬클럽 회장이었던 엄모씨는 양심수 석방 운동과 동강살리기 운동에 참여한 김혜수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팬 입장에선 너무 좋아요. 혜수 언니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 역시 양심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구요. '동강 살리기'에 대해선 제가 혜수 언니보다 먼저 관심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혜수 언니가 참여해서 더 기쁘구요."
팬은 스타를 상품으로 소비할 뿐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사랑한다. 그러므로 스타가 더 나은 인격체가 되기를 바라며, 그런 발상의 연장선에서 대부분의 팬은 스타의 정치 참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므로 정치인들이 만약 스타를 선거에 참여시켜 팬동원력을 확보하려면 거기 참여하는 스타야말로 기존 브라관에서의 이미지를 벗고 진지하고 성실한 정치참여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팬들로 하여금 "내가 사랑하는 스타가 저런 면도 다 있었구나. 다시 봤어." 이런 감동을 줄 수 있어야만 비로서 팬동원력이 확보되는 것이다.
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노무현 선거운동을 돕고 있는 탤런트 권해효이다. 그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운동참여의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이들이 살아갈 사회를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운동들은 주제를 달리해도 서로 얽히고 설켜있기 때문에 외면할 수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명계남이나 문성근의 경우, 평소부터 얼굴에 '나는 운동권이요.' 이렇게 명찰 붙이고 다녔던 사람들이니 이들이 노무현 지지운동을 해도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권해효 같은 사람이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하고 뚜렷한 소신을 갖고 노무현을 지지하는 것이 효과가 훨씬 크다. 팬들은 "아니, 권해효에게 저런 면이 있었어?" 이렇게 기특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전지현이 권해효 정도의 논리로 노무현이나 이회창을 지지한다면 20대 표심에 미치는 폭발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권해효나 전지현이 노무현 토론회에 나와서,
"노짱님, 연애할 때 양다리 걸쳤어요?"
이런 질문만 해댄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의 팬들은 노무현이 전지현을 강제 동원하여 딴따라 짓만 시켰을 거라 분노할 것이고 권해효와 전지현은 그나마 있는 팬마저 놓치게 된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TV 토론에 동원했던 대중 연예인들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었다. 평소에 남을 웃기는 개그맨일수록 정치에 참여할 때 더 진지해야 그 효과가 있음에도, 이회창 캠프는 처음부터 개그맨들에게 분위기나 띄우는 딴따라의 역할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해당 스타에 대한 모독이며 해당 스타의 팬들을 우습게 본 처사이자, 이회창 후보의 대중문화관 더 나아가 대중관 전체를 의심할 만한 발상이라 할 수 있겠다.
현대의 대중들은 정치인들을 그다지 위대하게 보지 않는다. 짜증만 주는 정치인들보다는 자신들에게 하루하루 기쁨을 주는 대중스타를 훨씬 더 위대하게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디 정치인 따위가 감히 대중스타를 딴따라 취급하며 동원용으로 써먹으려 하는가? 항상 위대하게 살아온 이회창 후보로서는 대중스타를 그 정도로 대단한 존재로 보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머리는 비뚤어졌어도 생각은 바로 하자. 표가 필요한 사람은 이회창 후보이지 대중스타들이 아니다. 지금의 딴따라 동원방식은 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안 되면 억지로라도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정리를 해보자. 사람이 아무리 과거에 큰 죄를 지었다 해도 반성할 줄 알면 용서가 되는 법이다. 선거운동기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회창 후보 휘하에 있는 800명의 대중스타는 언제든지 동원될 것이다. 이회창 후보가 스타의 팬동원력을 활용하고 싶다면 스타를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서청원급 정치인보다 더 위에 둘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회창 후보 스스로 그 해당 스타를 존경하면서 그 스타에게 최소한 자신의 지지이유를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 비추어 10분 이상 분량의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11월 10일 한사랑유세단 결성대회 때 베이비복스가 춤추며 노래한 모양인데 그런 것은 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팬들에게 몰매를 맞을 위험이 더 크다. 베이비복스의 간미연이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왜 집권해야되는지 상대편 논객 한둘 정도는 가뿐히 논파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줄 때 비로소 이회창 사단의 800명의 대중스타의 팬동원력도 힘을 받을 것이다.
원내 제 1당의 대통령 후보이자 당선가능성이 가장 높은 예비 대통령 이회창 후보에게 권해효의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그동안 대중문화인들이 했던 정치적 활동은 스스로 국회의원에 나서거나, 혹은 동원되거나 둘 중 하나였죠. 딴따라가 무식한 게 아니라, 그동안 정치적 의사표현 방식이 대체로 저급했기 때문입니다. 잘하면 질투받고 못하는 부분만 부각되니까 역사적인 상처가 있는 거죠."
이회창 후보의 건투를 비는 바이다.
* 필자는 [스타비평1-우리시대의 스타이야기], [스타비평2-스타 내 삶으로의 초대](인물과사상)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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