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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바디스 이인제, 최후의 결단을 기대하며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변희재   기사입력  2002/11/26 [01:00]
{IMAGE1_RIGHT}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포장마차에서 러브샷을 하며 후보단일화의 원론에 합의하기 직전, 나는 이미 이인제 의원에 대한 두 번째 글을 써놓은 상태였다. 제목은 <인제 인제 뭐 하니?> 였으니 글의 내용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갑자기 후보단일화가 합의되는 바람에 그 글을 업데이트할 수가 없었다. 후보단일화 합의로 상황이 급변하여 이인제 의원의 향후 진로도 그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가 되었다. 이인제 의원으로서는 최악의 결과이고 그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선조들의 격언조차 의심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2주 전에 그 글을 쓰기 위해 이인제 의원의 홈페이지를 검색하면서 나는 깜짝 놀랐었다. 노무현 지지자로 보이는 수많은 네티즌들이 그의 홈페이지에서 노무현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제님!
당신의 정치생명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대한민국의 큰 정치인으로 다시 태어나 주십시요.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후배들에게 소중한 꿈을 심어주십시요.
갈기갈기 찢긴 민주당을 다시 세우고 나아 가십시요.
다시한번 아름다운 정치인으로 태어나 주십시요.
철새들은 모두 날아갔으니! 새로운 보금자리를 민주당에서
만들어 주십시요 /희망의 정치


노무현 지지자들의 불타는 열정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이미 노무현 도우미로서의 역할을 단호히 거부한 이인제 의원에 대해 삼고초려, 사고초려, 오고초려까지 하는 네티즌들이 있다는 것을 노후보가 알기나 할까 모르겠다. 삼고초려는 커녕 일고초려도 하지 않은 그로서는 말이다.

나 역시 지금부터 한 달 전에 이인제 의원에게 노무현 후보를 도우라는 호소를 한 적이 있었다. 다만 노무현 지지자들과는 달리 노무현을 위해서 지지해달라는 게 아니라 이인제 본인 자신을 위해서 지지하라는 것만 달랐다.

노무현 후보 지지자들 중 이인제 의원에 대해 대단히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인제 의원이 민주계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점은 인정해줘야 한다. 정치인에게 혈통이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정치인이기 때문에 혈통을 중요시 여겨야 하는 법이다.  

보라, 2002년 대선의 철새들을. 대부분 전문가 영입파들로서 여야를 망라하여 권력을 쫒던 자들이다. 야당의 혈통을 이어받은 정치가들은 그렇게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지지기반과 인맥기반에 발이 묶어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움직여도 김민석 전의원만 집중 공격 타겟이 되는 이유? 바로 그는 정통 야당의 세례를 받으면서 정계에 데뷔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모두 포함해서 우리는 흔히 '정통성'이라는 말을 한다. 그나마 정통성이 있는 정치가들은 동네 양아치 수준의 막가파 정치는 하지 않기 때문에 '정통성'을 존중하는 법이다. 물론 최근 민주당의 작태를 보건데 그 '정통성'도 이제 약발이 다 되가는 것 같긴 하다.

동교동 출신들이 2002이 대선을 앞두고 흔들린 것과 달리  민주계 상도동 출신들은 이미 신한국당 시절 좌장 최형우의 몰락 이후 그 명맥마저 날려먹은 듯하다. 지금 한나라당 대표를 맡고 있는 서청원의 행태도 그렇고, 이 글의 주인공 이인제 의원의 행태를 봐도 그렇다.

아무리 보기 싫도 배알이 뒤틀려도 꾹 참고 두 달만 노무현을 도와주었다면 최소한 차기는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를 스스로 막아버릴 정도로 이성적 판단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이성적 판단력을 지키지 못한 것은 바로 정통성의 상실로 보면 될 것이다. 자신의 지지층이 무엇을 바라는지조차 인식할 수 없는 정신적 파탄 지경에 이른 것이다.

현재 이인제 의원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1. 이한동, 김종필과 함께 중부권 신당을 구상한다

그러나 이미 자민련의 지역구 의원들의 뜻이 한나라당으로 넘어갔고 후단협의 상당수가 민주당으로의 복당을 선언할 가능성이 높아, 교섭단체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신당의 대장을 맡을 이한동의 지지율이 1%도 안 될 정도로 세가 약하다.

2. 한나라당으로의 복당

97년 이후보터 이회창 총재와 막말을 주고받은 전과가 있긴 하나 이인제 의원 이상 가는 막말을 퍼부은 전용학 의원도 넘어간 마당에, 대의명분으로 슬쩍 포장하면 한나라당이 못 넘어갈 동토의 땅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장관과 경기지사까지 해먹은 마당에 한나라당에 가서 무엇을 할지 난감하다. 충남지사에 만족하지 않는 한 한나라당에서 한 자리 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종잡을 수 없는 이회창의 복수욕도 이인제의 생살을 떨리게 함에 충분하다.

3. 미워도 다시 한번, 노무현 밀어보자

지금 이인제 의원은 김종필 총재와 함께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서 잘못 판단내리면 충남지사도 못해는 수가 있다. 그나마 충남지사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길은 성질 죽이고 노무현을 도와 충청권 수도 이전에 몸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상실된 이성으로 이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를 이해했다면 한 달 전에 노무현 지지를 선언했을 테니 말이다.

오늘 오랜만에 이인제 의원 홈페이지를 다시 방문했다. 어쨋거나 그의 홈페이지는 노무현, 이회창, 정몽준, 김민석, 박근혜, 김근태, 이상수에 이어 방문자수 8위에 랭크되어 있다. 최소한 인터넷상에서의 이인제는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홈피에 남긴 네티즌들의 글은 한 달 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눈물로 이인제 의원의 지지를 호소하던 노무현 지지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의견은 하루빨리 한나라당으로 꺼지라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8개월 전만 해도 개혁세력의 차기 대권주자로 화려하게 부상했던 이인제 의원의 몰락을 보면 정치권이 보통 사람들이 들어가 활동할 곳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마튜어 정치논객이 봐도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을 프로 정치인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정치권은 무시무시한 흑막과 암투가 매일매일 벌어지는 곳이다. 잠깐만 한눈 팔면 그 흑막과 암투 속에서 정상적인 판단력조차 잃어버리는 곳이다.

이제 이인제 의원이 국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쇼는 서산의 지는 해 김종필과 함께 누가 더 빨리 지느냐의 싸움 정도가 아닐까? 혹시 모르겠다. 자신이 직접 사회를 본 국민경선이 사기극이라 외치고 다녔던 김영배 의원도 다시 민주당에 돌아와 노무현 선거운동을 할 것 같으니, 후단협과 함께 물타기를 하며 민주당 재건에 온 노력을 다한다면 다른 기회를 찾을 수 있을지. 노무현 후보 역시 포용력의 홍보 문제로 이인제 후보에게 마지막 배려를 해줄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쿼바디스 이인제, "이인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 묻는다면 그냥 말없이 그냥 떠날 것만 같으니,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라는 시 한 편 읊어주는 수밖에. 그나마 정통 야당세력에 대한 예의상 최후의 이인제 지지자를 자청하는 나의 마지막 호의조차 무시한다면 비싼 진달래꽃은 뿌려줄 수는 없고 염산을 뿌리는 것으로 만족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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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11/26 [01:0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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