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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기의 눈물이 주는 의미
승리는 이르다. 단일화의 굴욕을 잊지말아야
 
변희재   기사입력  2002/11/25 [23:41]
{IMAGE1_RIGHT}지난 일요일 후보단일화 조사가 시작되기 직전 민주당의 김원기 고문이 울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짧게 스쳐지나가는 모습이었지만 노정치인이 체면도 잊은 채 '엉엉' 우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슴 속에 무언가 뭉클함을 느꼈을 것이다.

김원기 고문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제 10대 총선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원내에 진입한 뒤 어느덧 5선을 거치며 현재 정대철, 조순형 의원과 함께 민주당을 지키는 고참 3인방의 위치에 올라서 있다.

87년 양김 분열로 군정종식에 실패한 뒤 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평민당의 원내총무로 야당 공조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고 92년도에는 대통령 선거대책위에서 뉴DJ 플랜을 기획하며 다시 한번 정권교체를 위해 힘을 쏟기도 했었다.

그러다 95년 김대중의 느닷없는 정계복귀로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자, 그는 그렇게 모시고 섬겼던 김대중을 뒤로 하고, 이기택 전 총재가 지역구도 극복과 야권 통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판단, 통일민주당을 떠나 노무현과 함께 국민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었다. 김원기의 정치 인생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 결국 2년 뒤 대의명분에 따라 김대중을 도와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여 정치인으로서 최고의 기쁨도 누리는 경험도 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가 2002 대선을 3주 앞둔 시점에서 전국의 시청자들을 앞에 두고 '엉엉' 울어버린 것이다. 뉴스의 멘트로는 정몽준 후보와 일전을 눈앞에 둔 노무현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라 했지만 그의 정치역정을 감안해 보건데 그의 눈물은 그렇게 단순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정치를 지나가는 개패듯 두들겨 패다보니 철새처럼 여야를 오가며 이권을 챙긴 정치인과 정통성과 원칙을 지켜온 정치인의 가치 차이를 좀처럼 구분하기 힘들게 되었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김원기와 서청원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 유권자 중 얼마나 되겠냐는 말이다.

특히 정통 야당의 줄기를 이어온 김대중 대통령의 실정으로 인해 그나마 남은 한 조각의 자존심마저 짓밟힌 상황이다. 이렇게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200만명의 국민을 참여시켜 노무현이라는 국민후보를 내세우며 꿈이여 다시 한번을 외쳤지만 이 역시 한 여름밤의 꿈처럼 8월 이후 급격이 거품이 빠지고 말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함께 정통 야당을 지켜온 김영배, 박상천, 정균환 등이 정통 야당의 계승자이자 국민후보 노무현의 등 뒤에서 칼질을 해대는 배신의 정치를 자행하면서 "너희가 수구세력보다 다 나은게 뭐냐?"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떳떳함마저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 내에서 아무런 기반도 없이 흔들리는 노무현 후보를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5선의 노정치인 김원기 고문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였건만 결국 대선을 위해 급조된 신당의 후보와 여론조사라는 러시아 룰렛 게임보다 더한 도박판으로 그를 내몰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노무현 후보가 손을 맞잡고 경쟁해야 할 다른 후보는 낡고 부패한 정치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재벌 현대가의 정주영 회장의 아들이었다. 협상과정도 평탄치 않았다. 반드시 단일화를 이룰 수밖에 없는 노무현 측의 약점을 빌미삼아 공세를 펴는 바람에 굴욕에 가까운 양보에 양보를 거듭했다.

"저도 25년 넘게 정치를 하면서 협상이라는 협상은 다 했지만 정말 참기 어려운…. 국민이 정말 원하니까... 하루에도 여러번씩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다"

협상이 타결되기 하루 전날까지 김원기 고문은 이렇게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 모든 것이 정통 야당세력의 부정과 분열로 인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폭락했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만약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에 패했더라면 그야말로 개혁진영 전체는 혼돈 상태로 빠져들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명분 하나로 버텨왔던 민주화 세력이,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았고 맞서야 할 때 맞서지 않은 재벌 출신 후보의 밑에서 선거운동을 해야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고, 현재 민주당의 면면을 볼 때 정통 야당세력은 완전히 파괴될 가능성이 높았다. 마치 3당 합당 이후 김영삼이 이끌었던 또 하나의 정통 야당세력이 현재 수구세력보다 더한 작태를 보이며 그 정신을 상실했듯이 말이다.

김원기 의원이 눈물을 보인지 12시간이 지난 뒤, 그는 다시 웃을 수 있었다. 간발의 차이나마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를 여론조사에서 눌러 개혁진영의 단일후보로 더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김원기 고문만 웃은 것이 아니라 노무현도 웃었고 정대철도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웃을 자격이 없어 보였던 한화갑도 웃었다.

노무현, 정대철, 김원기 등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그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후보단일화를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고 이겼으니 '기쁘다'고 끝낼 일이 아니다. 김경재 의원이 밝힌 대로 '패하면 정통야당 민주당이 사라진다.'고 공갈협박성 선거운동까지 해야하는 상황으로 몰아간 자들은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책임질 것은 책임져야 한다.

어제의 승리는 웃고 즐길 수 있는 승리가 아니다. 발표 12시간 전에 김원기 의원이 먼저 울었지만 앗차 하다간 수백 만명이 피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고 그 눈물을 닦아줘야할 세력 자체가 붕괴될 지도 모를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60%의 지지율을 살려내지 못하고 추락했던 노무현 후보 및 그의 측근들은 이러한 일을 또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노무현은 스스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개혁적 유권자들이 피눈물을 판돈으로 대주며 도박판에서 두 번씩이나 살려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대선은 앞으로 3주 남았다. 또 다시 지지율이 올랐다고 마치 당선이라도 따놓은 양 어깨에 힘주고 다니다가는 언제든지 추락할지 모르는 일이다. 노정치인 김원기의 눈물이 어제의 승리의 웃음보다 훨씬 더 소중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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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11/25 [23:4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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