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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있다
이인제가 기다린 노무현의 손짓
 
변희재   기사입력  2002/10/30 [18:57]
97 대선, 30만표의 비밀

97년 대선의 김대중 대통령의 승리는 하늘이 만들어주었다는 말들을 한다. 집권당 후보의 병역 파문, DJP 연합, 국민신당의 이인제 후보의 독자출마, 극한의 경제위기 등등, 모든 대선의 변수들이 김대중의 당선에 유리하도록 작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유리한 상황에서도 단지 30만표라는 1%의 박빙승부를 펼치며 간신히 당선에 턱걸이했을 뿐이다. 대선 전에 김대중 필패론을 주장했던 유시민씨조차도 "확률 상 이기기 힘들었다는 점은 변함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정치공학적으로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과연 김대중이 앞선 그 30만표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 비해 50만표나 적게 얻은 이회창 후보의 영남권 득표력이 30만표의 비밀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 지지자들이 비판적 지지의 논리로 찍은 1%(30만표)의 진보표가 그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97년 당시의 언론기사를 검토해보면 대전 45%, 충남 48.3%, 충북 37.4%의 표를 얻어 92년 대선과 비교하여 충청권 득표율을 15% 가량 올린 것이 바로 30만표차 승리의 가장 큰 비결이라는 시각이 주를 이룬다. 이른바 말많고 탈많았던 DJP 연합의 힘이 증명된 것이다.

무시할 수 없는 충청권의 정서

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예상 외로 1위를 차지하기 전까지만 해도 민주당 내의 주류 세력들은 바로 DJP 연합의 득표력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이인제 후보를 내세워 호남과 충청이 연합하여 수도권까지 장악하면 충분히 영남을 고립해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인제 후보의 낙마로 인해 호남충청 연합 논리는 사실 상 죽었다. 물론 아직도 정몽준 의원으로 후보 단일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있긴 하나 정 의원으로의 후보 단일화 논리는 지역 연합이라기 보다는 개혁세력의 중심 이동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개혁표만으로는 안 되니 보다 우측으로 옮겨 색깔을 연하게 해서 승부를 걸어보겠다는 것 말고 다른 뜻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정몽준 후보로의 단일화 논리를 득표력의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결과적으로는 호남 충청 연합과 매우 유사한 방식임을 알 수 있다. 과정을 생략하면 이유야 어찌되었건 김종필과 이인제라는 충청권의 스타 정치인 두 명을 민주당이 팽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민주당의 노무현 간판으로는 도저히 충청권의 표를 얻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앙일보에서 10월 25일, 26일 양일 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지지율 차이가 가장 많이 나는 곳 역시 대전.충청 지역이다. 노후보는 11.1%에 불과한 반면 정후보는 37.9%로 여전히 충청권 1위를 지키고 있다. 더구나 충청권에서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하여 이회창 후보와 맞서도 23.8%의 지지율에 그치고 있다. 이는 92년도의 김대중이 얻은 충청권 지지율보다도 떨어지는 수치이다.

이번 선거는 지난 선거에 비해서 지역구도가 상당 부분 퇴색될 전망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이며 다음 선거, 그 다음 선거를 거치면서 지역구도는 더욱 더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거판의 패러다임 자체의 변화를 주도하는 후보가 바람을 타고 높은 지지율을 얻어 승리할 때만이 그러한 변화를 더욱더 가속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승리의 과정과 결과가 100%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데에 있다.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는 지역감정이 화끈하게 불어버리면 그대로 필패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지역대결의 선거판을 바꾸어 계층 대결 혹은 세대 대결로 밀어붙이는 것이야말로 정치개혁의 전략이자 승리를 위한 전략이다. 하지만 큰 방향은 그렇게 나아간다 하더라도 지역정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개혁을 투표 기준의 제 1원칙으로 삼는 사람들만 투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먼 미래의 정치 발전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50일 앞으로 다가온 대선의 전략을 논할 때는 개혁을 투표 기준의 제 2원칙 혹은 제 3원칙으로 보는 사람의 표 역시 필요한 것이다.

이인제에게 찾아온 기회

{IMAGE1_LEFT}지금의 민주당으로서 정치개혁의 원칙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DJP 연합의 향수를 달래며 득표력을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바로 이인제 카드이다. 물론 이인제 의원은 경선 이후 음모론을 제기하며 민주당의 지지를 깎아먹고 실질적으로 민주당 내분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이인제 의원의 처지도 이해못할 것은 아니다. 친노 쪽의 신기남 의원 역시 느닷없이 상승한 정몽준 의원의 지지율을 음모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던가?

이인제 카드는 단지 호남 충청 연합의 득표 효과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명분 상으로도 얼마든지 함께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인제 의원이 너무나 조용한 행보를 하고 있었기에 다들 잊었을지 몰라도 그는 엄연히 민주당 소속이다. 정몽준이나 김종필과는 달리 노무현 의원이 백번 손을 잡든 야합이라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없다.

또한 그는 노무현 후보의 외연을 확대시킬 수 있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어 최소한 충청권에서는 개혁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특히 김종필과 비교한다면 더욱 그렇다.

더구나 그는 정통 야당의 한 줄기라 할 수 있는 민주계 출신이다. 노무현식의 정치개혁이 92년 3당 합당 이전, 더 앞으로 나아가 김영삼과 김대중이 손잡고 일으킨 1985년 신민당의 황색바람 복원이라면 민주계 출신인 이인제 의원을 제외할 이유가 없다. 남의 당에 가 있는 민주계 사람들과도 함께 할 생각을 갖고 있는 노무현 후보가 자기 당 소속의 이인제 후보를 내몬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한겨레21의 설문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의 최대 약점으로 꼽힌 리더십 부족을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이미 경선 결과 승자는 노무현이고 패자는 이인제이므로 승자가 패자에게 손을 내밀고 고개를 숙이는 것은 한국적 관습으로 볼 때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껏 그것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노무현 후보의 실책일 수도 있는 사안이다. 어쩌면 이인제 의원은 노무현의 손짓만을 기다려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인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있나

지난 25일 대전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후보는 "이 의원과 손잡고 싶은데 그 분은 제자리를 내드리면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그밖의 자리는 별로 관심이 없나 보다."라고 말하는 등 경선 이후 시종일관 이인제 후보와의 연대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면 노무현 후보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이인제 후보가 걸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대철 선대위원장과 김원기 고문의 계속되는 건의로 차마 어쩔 수 없이 이인제 의원과의 화해를 제안했는지도 모른다.

반면 이인제 고문으로서는 현재로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후단협이 와해되기 직전으로 몰렸고 한나라당으로 한번 더 옮겼다가는 영원한 경선불복의 대명사로 역사에 남을 수도 있다. 뭘 해도 민주당 내에서 승부를 거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다.

다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명분이다. 정적처럼 되어버린 노무현 지지를 호소할 수 있는 명분만 있다면 그 역시 대선을 정치적 재기의 발판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명분은 노무현의 손짓으로 시작하겠지만 역시 30%를 넘어서고 있는 반창 감정이라는 민심이다. 반창감정이 냉전수구세력들에게는 다시는 정권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민심으로 해석할 때 이인제 후보가 충청권에서 노무현 지지를 호소할 수 있는 명분으로서는 충분해 보인다.

정치인은 순간의 선택으로 최소 4년을 먹고 산다. 선언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 상 경선 불복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던 이인제 의원에게 그다지 많은 기회가 올 것 같지 않다. 노풍 때문에 몰락했다 노풍이 다시 재점화되는 시기에 찾아온 이 기회를 이인제 의원은 과연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다른 것은 몰라도 재기의 기회가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온 것만은 분명하다.

{IMAGE2_LEFT}장신기의 책 ‘이인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없다(노무현 필승론, 거름 2002)’에서 호남.충청 연합의 이인제식 집권방식으로는 이회창에 필패한다는 직격탄을 맞고 낙마한 이인제 후보, 이제 그는 민주당 지지자들을 상대로 다시 한번,

  "이인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있다."

라는 말을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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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10/30 [18:5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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