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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광고의 선구자, 데이비드 오길비
[20세기를 거쳐간 인물들] 광고를 예술아닌 상품판매 영역으로 끌어올려
 
두부   기사입력  2005/11/16 [16:16]
"눅눅한 화요일 아침 내 머리를 스친 쓸 만한 아이디어 하나가 나를 유명하게 만들어 버렸다." 현대 광고계의 신화라 불리는 데이비드 오길비의 말이다. 그의 손을 거쳐간 광고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었다.
 
▲ 광고를 상품판매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데이비드 오길비  
애꾸눈 신사를 등장시킨 '해더웨이 셔츠' 광고(1953년), 400년 동안 기아에 허덕이고 있던 푸에르토리코를 가난의 수렁에서 건져올린 관광 광고(1950년대), 도브(Dove) 비누 광고, "시속 60마일로 달리는 뉴 롤스로이스 차 안에서 가장 큰 소리는 전자 시계의 초침 소리입니다"라는 헤드카피로 천재성을 드러난 롤스로이스 자동차 광고(1958년) 등은 그가 왜 '신화'의 용상에 오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세계야생동물기금, 흑인대학연합기금 등 공익광고를 제작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광고의 마술사' '크리에이티브의 왕' '광고계의 대부' '광고계의 귀재'로 부른다.
 
데이비드 오길비는 1911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지만, 중도에 퇴학을 당하고 20대 초반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 농부, 호텔 주방의 조리사, 조리용 스토브 외판원, 여론기관 조사원 등의 일을 했다. 그는 38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광고회사를 창업했지만, 이후 제너럴 푸드, 캠벨 수프, 브리스톨 마이어스, 레버 브러더스, 쉘 오일 등 당시 미국의 거대 기업를 광고주로 삼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브랜드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각인시켰다.
 
헤밍웨이, 버나드 쇼, 올더스 헉슬리 같은 내로라 하는 작가들도 그의 광고 카피를 따라갈 만한 문구를 내놓지 못했다고 그는 언젠가 말하기도 했다. 인쇄 광고의 기대수명이 3초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사람들의 지갑을 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웬만한 문장으로도 어렵다는 말이다. 그는 광고가 예술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광고는 상품 판매와 직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불 꺼진 화산'이라고 표현한 그는 1966년 프랑스 남부에 있는 투푸(Toufou) 성(城)을 사들여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동안 자신이 세운 오길비 앤 마더사는 세계 5위의 광고회사로 자리잡아 갔다. 그는 1999년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광고가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한다면 그는 그 꽃을 화려하게 장식한 플로리스트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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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11/16 [16: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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