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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나찌를 사랑한 유태 여인
[인물과 사상의 눈] ‘악의 평범성’을 발견한 맑스 이후 최고의 여성철학자
 
편집부   기사입력  2005/09/16 [16:29]
▲Hannah Arendt(1906∼1975)     © 인터넷 이미지 검색
사상가는 사후 부활되곤 한다. 생존 당시보다 사망 이후에 더 각광을 받는 그런 사상가들 가운데 하나로 철학자이자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동구권의 몰락 이후 서방 세계에서 더욱 빛이 났으며, 국내에선 최근 김지하 시인이 그의 이름을 자주 언급하고 있거니와 99년 11월, 그의 70년 저서인 『폭력론』이 『폭력의 세기』(이후, 김정한 옮김)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여러 신문지상에서 그의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은 국내에서 출간된 그의 네 번째 저서이다.

아렌트는 1906년 10월 14일 독일 하노버에서 유태인 가정의 무남독녀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폴 아렌트는 엔지니어였는데, 한나가 여섯 살 때에, 결혼 전에 걸린 매독으로 사망했고 그로부터 7년 후 어머니는 재혼했다. 아렌트의 사상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유태인으로서 겪은 경험에서부터 출발한 것인데, 이에 대해 계명대 철학과 이진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렌트가 어렸을 때 집에서는 한 번도 ‘유태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나, 길거리에서 다른 어린이들한테서 반유태인적 욕설을 듣고 나서 비로소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이와 더불어 그녀에게는 ‘비록 독일 국적을 갖고 있지만 독일 민족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의식이 생겨난다. 이러한 의식은 ‘사람은 머리를 숙여서는 안 된다. 사람은 저항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신념에 의해 강화된다. 만약 선생님이 반유태인 발언을 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라고 어머니는 딸에게 지시하였다.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이라는 존재, 즉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에서 타자(他者)라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며 성장하였다.”

아렌트는 조숙했다.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되기도 전에 글을 읽었고, 열여섯에 이르러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그리고 야스퍼스의 『세계관의 심리학』을 읽었다. 고교 시절은 순조롭지 않았다. 이진우 교수는 아렌트의 학업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렌트는 한 선생과의 충돌로 수업거부를 주도하였기 때문에 퇴학당하게 된다. 아렌트는 그 후 베를린대학에서 2학기 동안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듣는다. …… 아렌트는-그녀가 훗날 ‘사유의 왕국의 숨은 왕’이라고 명명한 바 있는-하이데거의 명성에 끌려 1924년 가을부터 마르브르크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

아렌트는 열여덟에서 스물한 살까지 마르부르크 기간 동안 하이데거와 애정 관계를 가졌다. 20년 뒤에 하이데거는 한나 아렌트에게 ‘이 시기에 그녀는 자신의 활동의 영감이었으며, 열정적 사유의 자극이었다’고 고백하였다. …… 아렌트는 하이데거와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1925년 마르부르크를 떠나 프라이부르크의 후설에게로 옮긴다. 그러나 박사학위는 하이데거의 권유와 추천으로 당시 하이델베르크에 있던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에게서 받는다.”


아렌트의 논문 제목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나타난 사랑의 개념」이었는데, 그가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그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그 해에 귄터 스테른과 결혼했다. 히틀러가 집권하자 아렌트는 1933년 파리로 피신해 미리 망명 온 남편과 재회하였다. 그러나 둘의 결혼 생활은 37년에 이혼으로 끝났고, 아렌트는 40년에 하인리히 블뤼허와 재혼했다. 재혼 후 얼마 안 되어 그들은 프랑스 남부에 있는 각기 다른 수용소에 억류되었다가 독일의 파리 점령 때 가까스로 탈출하여 아렌트의 어머니와 함께 41년 미국에 갈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아렌트는 미국에서 유태인 관련 단체들의 일을 거들고 출판사 편집장 일을 하면서 활동했다. 그가 미국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 건 1951년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을 내면서부터였다. 나치즘과 스탈리니즘을 분석한 이 책에서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이 반(反)유태주의와 19세기 제국주의에 있으며 더욱 근본적인 뿌리는 대중적 인간의 고독한 심리적 상황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 책은 당시 최고조에 이른 냉전 분위기에 편승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후일(90년대 중반) 재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책은 냉전적 분위기 속에서 나치즘과 스탈리니즘을 전체주의라는 동일한 개념하에 다루기는 했으나 그 같은 체제하에서의 인간 조건을 통찰하는 데에 주목적이 있었던 것이지 비판론자들의 주장대로 냉전 분위기에 편승했던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아렌트는 1959년엔 프린스턴대의 첫 번째 여자 정교수가 됨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그 전까지 시카고대, 버클리대, 브루클린대 등에서 강의를 해왔다. 그는 60년엔 콜럼비아대로 옮겼으며, 63년에서 67년까지는 시카고대, 그리고 67년부터는 뉴욕의 망명자들이 주로 강의하던 ‘사회조사대학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강의를 했다. 70년 10월 31일 남편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아렌트는 75년 12월 4일 친구들을 접대하던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전체주의의 기원』 이후 아렌트가 낸 책으로는 『인간의 조건』(1958),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1961), 『혁명론』(1963),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암흑시대의 인간』(1968), 『폭력론』(1970), 『공화국의 위기』(1972) 등이 있으며 사후 『정신생활』(1978), 『칸트의 정치철학 강의』(1982) 등이 출간되었다.

학문적 평가와는 별도로, 아렌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어준 책은 1963년에 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었다. 이 책은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계명대 이진우 교수는 아렌트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60년 5월 24일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잡혀 이스라엘로 압송되었을 때, 한나 아렌트는 『뉴요커』라는 잡지에 이 재판 과정을 특파원으로서 추적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재판 과정에 관한 아렌트의 견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저서로 출판되는데, 아렌트는 이곳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지성계의 물의를 빚게 된다. 아이히만이 유태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결코 그의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진우 교수는 유태인으로서 아렌트에게 던져진 철학적 화두는 “어떻게 근본악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였다면서 1928년의 학위 논문에서 시작하여 『전체주의의 기원』과 『인간의 조건』을 거쳐 『정신생활』에 이르는 아렌트의 철학적 여정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의 시도였다고 말한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아렌트의 저서로는 앞서 거론한 바 있는 『폭력의 세기』 이외에 『공화국의 위기』(두레, 1979),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문학과지성사, 1983)과 『인간의 조건』(한길사, 1996) 등이 있다. 국내에 두 번째로 소개된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 출판평론가 최성일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을 통해 아렌트는 뛰어난 서평가, 평전 작가의 솜씨를 드러낸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은 모두 열 명. 독일의 극작가 레싱을 제외하면 모두가 20세기의 사람이고, 본인 또는 배우자가 유태인인 것이 공통점이다. 그리고 어두운 시대에 ‘내적 망명’을 감행한 망명자라는 점이 일치한다. ……

평전 형식의 서평이 이룬 놀라운 성취는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절정에 이른다. ‘잊혀진 혁명가’를 재발견하는 한나 아렌트의 시도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그녀 자신의 모습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념보다는 실현될 수 있는 이념을 추구한 점에서 룩셈부르크와 아렌트는 닮은꼴이다.

아렌트가 룩셈부르크의 ‘신화’를 바로잡았다면, 벤야민 ‘신화’는 그녀가 기틀을 다졌다. 벤야민 평전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서 가장 긴 글이고 내용도 압권이다. 벤야민에 대한 인물평으로 즐겨 쓰이는 인용문의 출전도 바로 이 글이다. 무엇보다 벤야민을 ‘밀착취재’한 것이 강점이나 사적인 교우관계를 공적 영역으로 승화시킨 점이 돋보인다. 아렌트는 벤야민이 ‘프리랜서 저술업이라는 간판 아래 끊임없이 불안하면서도 자유로운 문인으로서의 생활을 보냈다’고 평가했다. ……

브레히트 평전에서는 그에 대한 아렌트의 애증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을 브레히트의 시에서 따올 정도로 시인으로서의 위대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스탈린에게 헌시를 바친 미욱한 행동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비판을 가한다.”


▲한나 아렌트의 대표적 저작의 하나인 폭력의 세기     ©이후, 1999년 11월
『폭력의 세기』에서 밝힌 ‘폭력과 권력’에 관한 아렌트의 독특한 견해도 주목할 만하다. 세상 사람들은 ‘폭력=권력’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지만, 아렌트는 ‘폭력’의 반대가 ‘권력’이고 ‘권력’의 반대가 ‘폭력’이라고 말한다. 『폭력의 세기』를 번역한 김정한 씨의 자세한 해설을 들어 보자.

“폭력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고, 따라서 목적을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라면, 권력은 언제든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휴하고 행동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이미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이 폭력을 사용할 때, 그 권력은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권력을 폭력 수단으로 필사적으로 만회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이로부터 아주 급진적인 해석까지 가능해질 수 있다-폭력을 사용하는 권력은 이미 권력이 아니며, 아무런 정당성도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권력 세력이 아니라 폭력 세력이다. 오히려 권력은 그러한 폭력에 대항하는 자들에게 있다. 권력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토론하고 함께 행동하는 그 순간에, 바로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아렌트의 학문적 업적과는 별도로, 아렌트는 칼 야스퍼스와 마르틴 하이데거라고 하는 두 탁월한 철학자들과의 관계로 늘 주목을 받아왔다. 92년에 출간된 『한나 아렌트와 칼 야스퍼스의 편지』라는 책은 두 사람의 관계가 부녀관계에 가까웠다는 걸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1926년부터 1969년까지 43년간이나 편지 교환을 했다고 하는데, 정치학자 배병삼 씨는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승과 제자간의 편지는 2차대전이라는 전쟁통에 잠시 끊긴 것을 제외하고는 1945년 이후 더욱 잦은 교신을 갖는다. 1달 가량 편지가 도착하지 않은 것은 ‘심각한 배달 지연’이며 5주 정도 편지가 오지 않은 것은 ‘배달 사고’로 여겨질 정도였다. …… 아렌트의 아버지는 그녀가 6살 되었을 때 죽었다. 그리고 야스퍼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평생토록 아렌트는 야스퍼스를 ‘존경하는 분’이라는 경칭을 썼지 한 번도 야스퍼스의 이름을 ‘칼(Karl)’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은 이들이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렌트와 야스퍼스의 관계가 아름다운 것인 반면,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관계는 기이하다 못해 씁쓸한 느낌마저 갖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1924년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아렌트는 18살 소녀였고 하이데거는 35살 철학 교수였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4년 만에 끝이 났지만, 전후(戰後) 하이데거가 친(親) 나치 경력으로 수난을 당하게 되자 아렌트는 앞장서서 하이데거의 결백을 주장하고 나섰으며 그의 저작 홍보까지 떠맡았다. 95년 엘츠비에타 에팅거가 쓴 『한나 아렌트, 마르틴 하이데거』는 두 사람의 기이한 관계를 탐구한 책인데, 『교수신문』에 이 책의 서평을 쓴 미주통신원 최영진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렌트는 그의 위선적 태도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약 1년 동안 불같은 관계를 나누어 왔던 그녀에게 지적 미성숙을 이유로 마르부르그를 떠나도록 종용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그곳을 떠나게 된 것은 단지 하이데거가 처하게 될지 모르는 위험을 줄이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이데거는 용케 아렌트의 주소를 알아내어 그녀와 밀회를 즐겼으며, 그녀는 늘 그의 요구대로 따랐다. ……

1928년 훗설이 하이데거에게 정교수직을 물려준 그 해를 전후해서 그들의 관계는 마감됐다. 하이데거에게 새로운 여인이 생긴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새 애인에게 3년 전 아렌트에게 써보낸 싯구들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만남을 즐겼다. 아렌트는 하이데거가 훗설을 대학에서 내쫓는 서류에 서명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재촉한 ‘잠재적 살인자’라고 생각했다.

그런 하이데거를, 야스퍼스가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한 그를, 그녀는 어떻게 이해하고 그가 연구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까. 저자는 기본적으로 아렌트의 식지 않은 열정과 하이데거의 이용 혹은 유인에 있다고 설명한다. 하이데거는 전쟁 후 5년 동안 학문 활동을 금지당했다. 그의 나치 활동에 대한 비판이 수그러들지 않았기 때문에 1950년이 되어서도 그의 입지는 여전히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상황에서 아렌트 같은 유태인 학자와의 관계는 매우 절실한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나치 협조는 그들의 요구와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강변했다. 그의 변명은 매우 구차하고 위선적인 것이었지만 아렌트는 그의 잘못을 아내의 탓으로 돌리면서 그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의 아내가 하이데거보다 나치 활동에 더욱 열성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고하고 자기 확신에 찬 독일 최고의 철학자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

그녀에게 하이데거는 ‘신과 같이’ 사고의 세계에 군림하는 무관의 제왕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첫사랑의 어찌할 수 없는 각인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이해와 관대함이 뒤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과 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그에게 자신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음을 확신했다. 위대한 철학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고집과 이기심, 그리고 그녀에게 일방적인 순종과 공경을 요구하는 그에게 아렌트는 ‘노예의 미덕’으로 따랐다.”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기이한 애정관계가 화제가 되던 바로 그때에 아렌트는 사후(死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였다. 『동아일보』 95년 12월 18일자는 구미 사상계에서 “아렌트 열풍”이 일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4일은 독일 출신의 유태인인 그녀가 뉴욕에서 숨진 지 20년 되는 날이었다. 이 날을 기념해 아렌트와 스승 하이데거의 비밀스런 사랑을 다룬 전기가 독일과 미국에서 동시 출판, 논란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국제심포지엄 기념상 제정 ‘아렌트의 날’ 행사 등으로 구미 사상계 전체가 ‘아렌트 열기’에 휩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한 출판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독일인들』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여성을 한 명도 포함시키지 않았다가 ‘한나 아렌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면 독일 출판업자의 자격이 없다’는 언론의 비난에 혼쭐이 나기도 했다.

이처럼 아렌트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의 사상이 마르크시즘이 한물간 시점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 따른 것이다. ‘진실의 징표 아렌트’라는 제목으로 열린 한 기념학술대회에서 에른스트 폴라트(쾰른대ㆍ철학)는 ‘지난 60년대 아렌트는 한때 냉전주의자로 비난받기도 했으나 이제는 오히려 좌파에 의해 우상으로 추앙받고 있다’면서 ‘당분간 마르크스는 죽은 것으로 보이나 아렌트는 살아 있다’는 말로 그의 위력을 요약했다.

인간행동을 결정론의 관점이 아니라 그리스 전통으로부터 유장하게 흘러나오는 자발성과 ‘자유의 신장’이라는 각도에서 설명하려는 그의 정치철학이 동구권 변혁 이후 서구에서 각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Ω김창희, <구미 사상계 “아렌트 열풍”>, 『동아일보』, 1995년 12월 18일, 22면.

Ω배병삼, <격동기 두 독일지성의 서한집>, 『출판저널』, 1992년 10월 20일, 28면.

Ω이진우, <근본악과 세계애의 사상: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이진우ㆍ   태정호 옮김, 『인간의 조건』(한길사, 1996), 25∼27, 29∼30쪽.

Ω최성일,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 『인간의 조건』 쓴 한나 아렌트>, 『도서신문』, 1998년 2월   9일, 13면.

Ω최영진, <한나 아렌트와 마르틴 하이데거: 유태인 소녀가 나치 철학자를 사랑할 때>,
 『교수신문』, 1995년 11월 6일, 9면.

Ω데보라 G. 펠더, 송정희 옮김, 『세계사를 바꾼 여성들』(에디터, 1998), 134쪽.

Ω존 레흐트, 곽동훈 외 옮김, 『문화연구를 위한 현대사상가 50』(현실문화연구, 1995), 361쪽.

Ω한나 아렌트, 김정한 옮김, 『폭력의 세기』(이후, 1999), 17∼18쪽.


 * 본문은 『시사인물사전 2』(인물과사상사, 2000년 1월)에 발표된 것으로 웹진 <인물과 사상>(www.inmul.co.kr)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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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9/16 [16:2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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