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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원의 영국보기] 스코틀란드는 독립국가?
저항과 킬트의 나라, 스코틀란드를 가다(2)ba.info/css.html
 
배정원   기사입력  2002/06/19 [17:26]
스코틀란드는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갤릭(Gaelic)語를 쓰고 농업중심의 씨족사회였던 북부 산악지대의 하일란드(Highland)와,  영어를 사용하고 순수켈트족이 아닌 브리튼족은 앵글로족과 피가 섞인 혼합민족이며 주로 상업과 공업에 종사하는 로우란드(Lowland)이다. 개화된 로우란드인들은 하일란드인들을 야만인이라고 무시했고, 하일란드는 왕정보다는 씨족사회 제도를 가지고 있어 남쪽 로우란드인들이 고유풍속을 지키지 않고 뿌리를 잊어버렸다고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 이렇게 하일란드와 로우란드는 서로 문화나 관습이 달라 이질적인 면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수 천년간을 같이 살아온 동포나 다름이 없다.

배정원, [배정원의 영국보기] 스코틀란드는 독립국가? 저항과 위스키의 나라, 스코틀란드를 가다(1), 대자보 85호

{IMAGE1_LEFT}지난호에 잠깐 언급한 윌리엄 월레스의 활약과 또한 로버트 부루스(Robert Bruce)가 1314년 6천명의 병력과 말 550필로 잉글란드군을 격퇴한 덕분으로 스코틀란드는 1707년 합병때까지 그런대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합방한지 얼마되지 않은 1745년 하일란드인들은 로우란드까지 합한 전체 스코틀란드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망명중인 스튜워트왕가의 찰스왕자를 스코틀란드의 왕으로 내세웠다. 합방후에 이래저래 간섭이 많은 영국정부에 불만이 많았던 스코틀란드는 독립왕조의 복귀를 꿈꾸며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용감무쌍한 하일란드인들은 평소의 전투실력을 십분발휘하여 파죽지세로 잉글란드군을 무찌르고 남진을 계속하여 수도 런던에서 불과 130마일 정도 떨어지지않은 더비(Derby)까지 진격해왔다.

스코틀란드의 공세에 다급해진 영국의회는 런던이 함락될 경우를 대비하는 대책을 세우는 등 그야말로 위급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전쟁은 하일란드군이 정치적 계산도 없이 단지 대의명분과 정의만을 내세우고 혈기로 일으킨 것이었다. 따라서 자연히 뛰어난 지도자도 없었으며 치밀한 계획도 없었다. 한 번 칼을 뽑았으면 무우라도  베어야할 판인데 어찌된 일인지 잉글란드에 본때를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런던공략을 앞두고 하일란드군은 돌연 회군해버린다. 결과적으로 보면 성급하게 결정한 뼈아픈 큰 실수였다. 연거푸 패배를 당한 잉글란드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스코틀란드로 돌아가는 하일란드군을 역습해 클로던(Culloden)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하일란드군은 거의 천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되돌아가느라 보급도 형편없었고 무척 지쳐있었던 것에 반하여 잉글란드군은 야포와 신식무기로 무장하여 지치고 배고픈 하일란드군을 격파한 것이다. 마치 동학혁명 당시 최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변변찮은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농민군을 궤멸한 것처럼.

클로던 전투 다음해인 1747년 하일란드 재봉기를 두려워한 영국의회는 하일란드 문화 말살정책의 법안을 통과시켜 하일란드인들의 무기휴대를 금지하였고, 전통복장인 킬트와 백파이프 사용까지도 금지시켰다. 더 나아가 씨족제도의 붕괴를 위해 족장의 토지를 몰수하고 족장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 등 씨족제도를 아예 폐지시킨다. 동시에 하일란드 주민을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강제로 대량이민을 보내거나 남자들은 군대에 강제로 입대시켰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하일란드 클리어런스'(Highland Clearance)라고 부르는데, 말그대로 청소하듯 하일란드의 씨족제도, 문화, 습관을 말살하고 토지를 몰수하는 등 하일란드 '말살정책'을 썼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행했던 정책이 '하일란드 청소'와 너무 흡사한 것은 결코 아이러니가 아니다. 일본이 식민지 제국의 원조인 잉글란드에게 이미 한수를 배워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졸지에 삶의 기본이 된 씨족사회가 해체되었기에 하일란드인들은 생활의 터전과 문화를 잃었고, 킬트를 입지 못하고 백파이프를 불지 못하는 등 민족자부심을 완전히 상실한 민족이 되었다. 또한 민족어인 갤릭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토지를 몰수당해 경제적인 궁핍의 나락에 처하게 되었다.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 핍박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우리 한국인은 하일란드의 한맺힌 역사를 이해하고도 남으리라. 땅과 얼을 빼앗긴 하일란드인들은 로우란드에 내려가서 머슴살이를 하거나 멀리 이민선을 타고 한맺힌 타향살이를 하는 수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하일란드를 떠나기를 거부한 일부 씨족(Clan)들은 산속으로 숨어다니며 겨우 연명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몸이성한 장정들은 영국이 강제로 군대에 입대시켜 대영제국의 식민지 전쟁의 최전선으로 끌려나갔다. 마치 조선의 청년들이 일제가 일으킨 전쟁의 최전방에서 총알받이가 되었듯이. 이리하여 18세기까지 내려오던 하일란드의 씨족제도는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IMAGE2_RIGHT}한편 잉글란드에 우호적이고 상업적인 이해관계로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로우란드인들은 하일란드 씨족제도 등 관습과 문화가 말살당하자 점차 하일란드 문화를 그리워하며 그들의 수난을 동정하기 시작하였다. 스코틀란드가 낳은 대문호인 월터 스코트(Walter Scott)는 애절한 필체로 그의 문학작품을 통해 하일란드의 씨족제도, 관습 등을 낭만적으로 승화시켰다. 하일란드의 복고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요즘은 로우란드인들도 하일란드의 애가를 즐겨부르며, 애수에 젖는다. 하이란드는 스코틀란드의 정신적 지주였고, 아직도 스코티쉬의 가슴속에 추억으로 남아있다.
스코틀란드의 성도 에딘버러성

그결과 1800년경에는 겨우 수십종이던 타-탄이 지금은 수천종에 달하고 스코틀란드 전역에 천개의 백파이프 밴드가 생겨나고 킬트는 스코틀란드인이 즐겨입는 의상이 되었다. 하일란드 특유의 전통의상인 킬트는 주로 남자들이 입으며 (킬트는 스커트처럼 보여 여자옷으로 착각하기 쉽다) 양모천을 사용한다. 허리에 두꺼운 가죽띠가 붙어있고 둥근호주머니가 전면 중앙에 달려있으며, 어깨에는  체크무늬의 타-탄을 두르는데 거의 땅에 닿을 정도이다. 타-탄의 무늬는 각 씨족을 상징한다. 이 킬트와 타-탄에는 그에 맞는 구두를 신어야한다. 부루구스라 부르는 이 구두는 보통 사슴가죽으로 만든 질긴 단화이다. 일전에 스코티쉬 후예인 어떤 미국인이 하일란드에 관광차 와서는 킬트도 입어보고 백파이프 연주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적이 있다.

핍빅민족의 서러움과 한맺힌 역사속에 살아서인지 몰라도 처량한 백파이프 연주에 애절한 갤릭어로 부르는 스코틀란드의 민요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 - 스코틀란드에 대한 강한 추억과 남모르는 향수를 불러온다.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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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6/19 [17:2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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