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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병역거부, 그리고 '항소이유서'
전쟁과 폭력을 막고 평화를 위한 행동에 대해 감히 무죄를 주장합니다
 
임재성   기사입력  2005/04/29 [18:53]
*  전쟁없는 세상(www.withoutwar.org)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 수감중인 임재성 씨의 항소이유서를 보내주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누리꾼 여러분들의 다양한 입장과 토론을 환영합니다-편집자 주..
사건번호 : 2005노*** 병역법위반

      항 소 이 유 서
      수번 : 서울구치소 ****
      이름 : 임재성
      죄명 : 병역법위반
      거실 : 10上**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 항소1부 재판장님 귀중

      본적 : 서울시 성북구 xxxxxxxx
      주소 : 서울시 성북구 xxxxxxxx
      주민등록번호 : 800807-*******

 
      평화를 위한 저의 행동에 대해서 감히 무죄를 주장합니다.
 
      현명하신 재판장님.
 
      저는 내면의 진지한 성찰을 통해서 살인과 전쟁을 예비하는 군사훈련을 받지 않기로 결심하고 병역을 거부했습니다. 군사훈련을 배제한 다른 방식의 복무를 통해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병역법은 저와 같은 젊은이들에게 그러한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병역거부’를 선택했고 그 이유로 1심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인 저의 항소는 사실 병역거부자들이 일반적으로 택하는 길은 아닙니다. 저와 같은 병역거부자들은 대부분 1심을 마치고 항소를 포기합니다. 물론 그들이 항소를 포기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처벌을 인정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60년이 넘도록 ‘국가안보’만을 반복하며 기울대로 기운 사회, 그 속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자 감옥을 택하는 이들은 억울하지만 ‘견디고’있을 뿐입니다. 저의 재판을 담당하실 재판장님 역시 저의 항소를 의아하게 여기실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해 재징집을 면할 수 있는 1년 6개월의 형을 주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판단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 진심으로 저의 행동이 처벌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모순된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전 1심에서의 유죄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다음의 이유로 저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1. 저의 병역거부는 인류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인 ‘평화’를 실현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대학교 시절과 사회단체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모든 전쟁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사회의 다양한 면을 알고 싶었고, 참여해보고자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철거민들의 주거권을 지키기 위한 실천에 함께하면서 이 사회의 감추어진 모순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주노동자와 장애인들의 싸움에 연대하면서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 고통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2002년부터는 평화주의 운동으로 시야를 넓혀서 실천을 만들어갔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차세대 전투기(F15)도입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는데, 전 F15도입 반대운동을 하면서 그 이유로 ‘미국’것이기에, ‘성능이 떨어지기에’가 아니라 ‘무기로 평화를 살 수 없다’의 논리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즉 보다 많이 무장하는 것은 평화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불러오는 길이며, 평화군축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당시는 60년 가까이나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어 있었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언론의 조명과 시민단체의 활동 속에서 ‘운동’으로서 발전되던 시기였습니다. 병역거부운동 역시 당시 제가 했던 평화주의 운동의 맥락에서 적극 지지할만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저는 병역거부자의 인권이 보장되기 위한 대체복무제 개선운동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평화주의 운동을 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이 운동의 가치를 더욱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은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넘어서서 타인의 생명을 죽이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려는 역사의 정당한 발전이라는 인식입니다. 또한 개개인의 인권을 넘어서서 인류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가치있는 행동이며 역사 속에서 단 하루도 쉼 없이 계속되었던 전쟁을 멈출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당시부터 이후 입대영장이 나온다면 나 역시도 군사훈련을 거부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이후 2003년, 2004년 대학에서, 평화단체 ‘전쟁없는세상’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인정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스스로의 병역거부에 대한 결심을 더욱 강하게 확신하며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결심을 지난 2004년 12월 13일 입영일에 입영하지 않음으로써, 군사훈련을 거부하겠다는 저의 양심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현행법상 저의 행동은 병역법 위반으로 고발되었으며,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씀과 함께 1심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난 저는 저의 생각이 결코 혼자만의 몽상이나 ‘뜻은 좋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상주의 역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후 이 글을 통해서 저의 주장과 행동이 현실 속에서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실현될 수 있는 가치임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먼저 그 시작으로 ‘대체복무제의 개선’을 통해서 병역거부자의 인권이 보장되는 것을 원합니다. 이 부분은 우리의 편협한 ‘안보 이데올로기’만 극복할 수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더 나아가 비폭력 평화주의에 근거한 저의 행동이 한 개인의 군사훈련 거부를 넘어서서 국가와 전쟁, 폭력에 대한 지배적인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저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과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서 스스로 총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저의 이러한 행동이 처벌받고,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전 감히 저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2. 저의 병역거부는 전쟁과 폭력을 멈추기 위한 ‘사고의 전환’을 통해서 이해되고, 긍정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근대국가의 핵심을 ‘정당한 폭력의 독점’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국가와 다른 유사조직간의 결정적인 차이는 ‘폭력의 독점권’에 있다는 분석으로 이는 현실국가에서 경찰권, 처벌권, 교전권으로 외화됩니다. 국가가 이 독점권을 소유하고 집행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가지면서 국민들은 국가의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경찰의 물리력은 공무집행이며, 사형은 살인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듯 말입니다. 테러리스트의 폭탄공격 소식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지만 연일 매스컴을 통해 나오는 이라크의 주검과 폐허는 미국을 위시한 국가군대의 ‘정당한 폭력’에 의한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 폭력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 역시 못하게 돼버립니다. 이 현상은 군대와 무기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군대의 본질은 살인집단이고 군인들이 받는 훈련은 살인훈련이다.’ 이러한 표현은 명백한 진실임에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조국방어를 위한 ‘정당한 폭력’이라는 논리가 마법이 되어서 본질을 다르게 포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군인들은 군대에서 살인을 위한 훈련을 받는 것이며 최첨단 전투기와 미사일도 사람을 죽이는 기계일 뿐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수많은 생명을 죽일 수 있는 비싼 기계이지요.
 
      이처럼 정당한 폭력을 독점하므로써 폭력이 폭력으로 생각되지 않는 마법은 근대국가의 구성원리상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통해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국가가 그것을 사용해서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과 기대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국가는 오히려 국민들을 철저하게 배신합니다. 근대국가의 완성과 함께 ‘폭력독점’체계가 대대적으로 정비된 20세기, 그 20세기만큼 폭력에 의해 살해된 인간이 많았던 시기는 인류 역사에 없었습니다. 그 살인의 주체는 범죄집단도, 테러리스트도 아닌 바로 국가였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20세기에 국가에 의해서 살해된 인간의 수를 약 2억명으로 추정하는데 그 중 외국인보다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폭력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것입니다. 2억명 가운데 약 1억 3천만명이 자국민이라는 자료를 통해서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이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도, 심지어 자국민을 보호하지도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럼멜<정부에 의한 죽음>참고)
 
       당장 20세기 우리의 역사만을 돌이켜보아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6.25라는 비극 속에서 우리는 ‘적군’이 아닌 민간인을 이념의 잣대로 수없이 학살했습니다. 휴전 이후에도 제주 4.3을 비롯해서 이념대립을 이유로 한 국가의 민간인 학살은 계속되었고, 군사독재 하에서도 광주항쟁의 수많은 희생자와 민주화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기억은 우리나라의 ‘정당한 폭력’이 얼마나 많은 자국민을 죽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군대가 침략과 살인이 아닌 자국방어를 위해서 존재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병역거부자에게 종종 ‘집에 강도가 들어오면 어찌하겠는가’의 질문도 던집니다. 강도에 저항을 하는 것과 군인이 되는 것이 같다는 논리지요. 그러나 ‘자국방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군대와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던 전쟁의 기록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물론 국가가 가지고 있는 교전권은 자위권이 전부입니다. 침략할 수 있는 권리는 적어도 유엔 헌장이 성립된 이래 국제법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이를 국내법으로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침략 전쟁은 범죄일 뿐입니다. 그런데 모든 국가의 군대가 ‘자국방어’만을 한다면 전쟁이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아니 정반대에서 더 나아가 모든 전쟁이 ‘자국방어’를 위한 정의로운 전쟁이 되었고, 그 이름 앞에서 모든 학살과 폭력은 정의이며 애국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자기 집을 강도에게서 지킨다고 하며 다른 집에 침입한 꼴이 된 것입니다. 요즘 한창 이슈인 일본 역사왜곡의 본질 역시 자신의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몸부림일 뿐입니다. 마치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던 베트남의 양민들을 무참히 살해했던 월남파병군인을 우리가 애국참전용사로 기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국가가 정당한 폭력을 독점하고 행사할 수 있었던 근거인 ‘평화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은 배신당했고, ‘평화’는 전쟁과 폭력을 합리화하기위한 ‘명분’으로 이용될 뿐이었습니다. 석유와 패권을 위한 이라크 침략의 명분을 ‘평화와 자유’라고 선언하는 모습. 일본이 과거의 침략전쟁을 미화해서 자신의 후손들에게 기억시키고자 하는 모습.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린 반세기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전쟁의 정당성’이 얼마나 반성없이 오용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모습에는 우리 역시 빠지지 않습니다. 일본이 자신의 식민지 침탈을 ‘동아시아의 근대화 발전’을 위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국민적인 분노와 치욕을 느끼면서도 침략국을 도와 세계 3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이라크 파병에는 ‘이라크의 평화와 재건’을 위해서라며 손 흔드는 우리의 모습. 이 모습에서 훗날 이라크 민중들의 우리의 행위에 대한 항의와 사죄요구가 예상되는 것은 저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면 고통이고, 우리가 가하면 평화와 발전이라는 억지가 바로 ‘정당한, 정의로운 전쟁, Kill'em All in the name of Justice'의 논리입니다. 그렇기에 전 정의로운 전쟁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국의, 한 집단의 시야를 넘어서서 모든 인류의 관점에서는, 모든 전쟁은 언제나 그릇된 전쟁일 뿐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일체의 전쟁을 반대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폭력’자체가 정당할 수 있는 것인가로 우리의 고민을 확장시켜야 합니다. 폭력은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입니다. 폭력 속에서는 어느 누구도 승리할 수 없고, 모두 피해자가 될 뿐입니다. 그렇기에 국가가 그 폭력을 ‘독점’하고 ‘관리’한다고 해서 평화를 실현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많은 국방력을 통해서 우리가 안전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인 미국의 국민들은 평화롭게 살고 있을까요? 언제나 테러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는 그들이 택한 해결책인 ‘테러와의 전쟁’은 무엇을 해결했나요.
 
         폭력을 행함으로 더욱 큰 폭력의 위협 속에 살 수밖에 없는 현실. 이제 우리는 이 사슬을 끊어내고 새로운 인식의 전환과 실천을 시작해야 합니다. 국가에게 폭력을 독점시키면 국가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며 그 폭력의 힘과 우리의 평화가 비례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무기를 늘림으로써가 아니라 줄임으로써, 보다 많은 이가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 총을 놓음으로써 평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 그 용기있는 사고의 전환을 통해서 우리는 끝도 없이 계속되는 죽음의 축제를 끝내고 진정한 평화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3. 그러한 변화의 시작으로 대체복무제의 개선을 통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부터 보장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에서 서술한 것들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계속된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과 사회구조의 변화 역시 오랜 시간의 노력을 통해서 가능할 것입니다. 그 변화의 시작으로 저는 대체복무제의 조속한 개정을 주장합니다. 병역법 개정을 통한 대체복무제의 개선은 단순한 제도개선의 차원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사회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할 수 없는 생각으로, 병역거부자를 처벌해야 할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그들의 생각 역시 공존할 수 있는 생각이며 그들에게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인정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현실적 방법으로 이야기되는 대체복무제는 당연하게도 특권이나 예외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나라의 현실 여건상 현행 복무여건보다 훨씬 길고 어려운 일이 의무로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비롯한 병역거부자들은 간절하게 대체복무제를 통해서 이 사회를 위한 저희의 의무를 다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복무기간이 3년이든 5년이든 저희의 양심이 인정이 되어 ‘군사훈련’을 배제한 의무가 주어진다면 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입니다. 병역거부자의 생각이 드디어 이 사회에서 공존할 수 있게되고, 진정한 평화실현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기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체복무제의 개선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다양한 방면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의 항소이유서에서는 미국과 국제사회가 어떻게 병역거부자를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를 시행하게 되었는지를 서술함으로써 한국사회에서도 변화가 필요함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는 특수한 상황이다’라는 논리 속에서 해외와 국제사회의 사례가 경시된 측면이 있으며, 그 사례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체복무도입의 사례를 이야기하기 전에 미국의 귀화과정 중 일부를 잠시 살피고자 합니다. 미국 시민권자 후보들은 시민권 획득 과정에서 ‘충성서약’이란 것을 해야 하는데 그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나는 맹세로써 선서합니다. 법이 요구할 때에는 미국을 위해 무기를 들겠습니다. 법이 요구할 때는 미국의 군대 내에서 비전투복무를 하겠습니다. 법이 요구할 경우 민간의 지휘 하에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수행하겠습니다.’ 이 세가지 표현은 시민권자 후보 중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 배려는 징집대상의 분류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미국은 평시에는 모병제를 시행하기에 대체복무제는 기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시에는 징집제를 시행하기에 병역거부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의 충돌이 발생합니다. 이를 귀화과정에서 확인한 것처럼 ‘복무가능자’, ‘비전투복무가능자’, ‘완전거부자’의 분류를 통해 차별없이 각각의 신념을 존중하며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별없는 공존의 ‘상식’을 가지고 말입니다.
 
      ‘전쟁의 위협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사례를 이렇게 일축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이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의 고민을 심화시켰던 시기는 역설적으로 2차 세계대전 참전 시기였습니다. 전쟁의 실상을 군인들이 몸으로 느끼며 필연적으로 살인행위에 대한 거부자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초기에는 처벌로 일관했으나 처벌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했는데, 그 시작은 다름아닌 바로 군대 내부였습니다. 1940년 당시 미 병무청장으로 대체복무제 도입에 앞장섰던 Hershey장군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소수자의 권리를 보존하기에 충분한지 알아내기 위한... 민주주의에 대한 실험”이라며 이 문제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헌법재판소가 판결문에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안보를 저해할 수 있는 무리한 입법적 실험을 할 것을 요구할 수 없다.”라고 한 것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1965년 미국 대법원은 ‘종교적 신념에 필적할 수 있을 정도로 한 개인의 인생에서 진지하고 의미있는 신념’으로 병역거부의 기준을 정식화하고 이후 인정의 폭을 더욱 넓혀갑니다. 또한 베트남전에 대한 광범위한 병역거부운동은 이후 미군의 동남아시아 철수와 1973년 징병제 폐지까지 이루어내게 됩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특정 국가나 특정 종교의 문제가 아니였기에 군대를 가진 모든 나라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렇기에 유럽을 중심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병역거부권의 흐름과 대체복무제 시행의 경험은 개별국가를 넘어서 국제사회에서 고민되기 시작합니다. 국제사회가 병역거부자와의 공존이라는 공동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가는 노력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966년 UN에서 채택한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B규약)’ 제 18조를 근거로 해서 1993년 제 48차 UN 인권이사회는 일반의견으로 “치명적인 무력을 사용할 의무는 심각하게 양심의 자유와 자신의 종교 혹은 신념을 표현하는 권리와 심각하게 충돌할 수 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1998년 UN 인권위원회 결의 제 79호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국제적 인권’으로서 인정됩니다. 즉 “사상·양심과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의 합법적인 행사로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권리를 가짐을 확인한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 이후 2000년, 2002년, 2004년 계속하여 UN 인권위원회에서는 각국의 현재법과 관행의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외국의 사례와 국제사회의 지혜, 그리고 긴 침묵 속에 묻혀있었던 병역거부자 스스로가 입을 열면서 견고하게 닫혀있던 우리사회에서도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병역거부자에 대한 최초의 무죄판결이 있었던 2004년만 해도 비록 유죄와 합헌으로 결정되어졌지만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 속에서도 대체복무의 필요성을 적지 않은 재판관님들이 언급하셨습니다.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류의 평화적 공존에 대한 간절한 희망과 결단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며, 비폭력·불상생·평화주의 등으로 나타난 평화에 대한 이상은 오랫동안 추구하고 존중해온 것”이라고 말씀하신 재판관님의 판결문은 그 변화가 어느새 큰 걸음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입법부에서도 그러한 흐름을 받아 안아서 대체복무제 개정을 위한 병역법 개정안이 상정되어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국회 국방상임위의 주체로 공청회가 진행되었는데, 당장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인원제한을 두는 ‘쿼터제’ 논의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현재 전세계 병역거부 수감자의 80%는 한국 감옥에 있습니다.(2004년 9월 기준) 1939년부터 60년이 넘는 시간동안 1만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감옥에 갔었고 평생 전과자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천명에 가까운 병역거부자가 수감 중에 있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변화는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감격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렇기에 이 변화는 중단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4. 진정한 평화가 우리 사회에서도 시작될 수 있도록 재판장님의 용기있는 판단을 부탁드립니다.
 
      두서없는 항소이유서의 결론을 쓰면서 없는 글솜씨에 저의 진심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그렇기에 제가 2002년 처음 병역거부를 고민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되새겼던 말을 통해서 제 항소이유서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대체복무제 서명용지를 들고 사람들에게 다가서면 나라 말아먹을 놈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스스로의 병역거부 신념을 밝히자 병역기피자-파렴치범으로 취급당했을 때도, 자식이 감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에 오열하셨던 부모님을 대하면서도 전 이 말을 되새기며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진심은 통한다.’ 폭력이 없어지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훈련과 무기가 없어지는 세상을 위한 저의 진심, 평화에 대한 저의 진심이 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비록 당장의 큰 변화가 쉽지는 않겠지만 전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려고 합니다. 한 사람, 두 사람이 가다보면 결국 길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결국에는 진심이 반드시 통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이상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임재성 후원모임 안내 http://peaceholic.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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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4/29 [18:5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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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보로시 2006/01/31 [01:40] 수정 | 삭제
  • 윗분의 설명이 부족해서 그렇지 결론은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군대가 평화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는 평화라는 것을 모릅니다. 간단한 겁니다. 전쟁이 없다고 하더라도, 수백만명이 실직자로 거리를 떠돌고 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합니다. 평화롭습니까? 평화롭지 않은데 어떻게 평화를 지킨다는 겁니까? 평화와 전쟁과 평화도 전쟁도 아닌 것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전쟁이 없으면 평화다라는 초등학교 수준의 사고로는 끊임없이 전쟁과 전쟁도 평화도 아닌 상태, 즉 평화가 아닌 상태만이 지속되겠지요.
    물론 평화로운 자들도 있겠지요. 그 사회의 지배층... 서민들이야 죽던 말던 무슨 상관입니까? 자신들의 재산만 안전하고 이익만 보장되면 오케이죠. 여기 댓글다는 분들중에 그런 계층의 분이 계시리라 생각되진 않습니다만...
  • . 2005/04/30 [16:06] 수정 | 삭제
  • 어떤 놈은 평화가 싫고 전쟁이 좋아서,사람 죽이는 일 좋아서
    다 군대가냐 임마.나라뺏겨 또 식민지되도 좋으냐 이놈아?
  • 지나가다 2005/04/30 [13:58] 수정 | 삭제
  • 니 말대로면 이순신장군이나 일제시대 무장투쟁하신 독립군들 전부다 평화를 깬 죄인들이네
    당신이 말하는 진심 북한에 가서도 야그 해보슈 거서 머라 하는지.
  • 292513S 2005/04/29 [23:48] 수정 | 삭제
  • "뜬구름 잡는 소리입니다."라고 한줄 요약이 가능한걸 장황하게 늘어놓기만 했네. 어쨌든 쓰느라고 수고했긴 하지만 이쉐킨 아마 대학논술은 빵점맞은듯... 논리가 순환논증에 빠지니 딱 '항소기각'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