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우리 글자요 우리말을 한글로 적기 아주 좋은 글자인데 쓰지 않는 이 나라 정부와 학자와 신문을 보면서 그것은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바로잡으려고 대학에 들어가 1967년에 국어운동대학생회를 만들고 정부에 한글을 살리고 빛내어 나라를 일으키라고 외쳤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처럼 한자혼용으로 교과서를 만들다가 우리 학생들 말을 듣고 한글전용 정책을 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우리 말글이 있는데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짓지도 않고 적지 않는 것 또한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내 이름을 우리 말글로 ‘이대로’라고 스스로 지어 불렀다. 세상사람 모두 한자가 좋다고 하더러도 나는 한글을 사랑하고 내 뜻대로 한글을 쓰겠다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이렇게 한글운동을 하다 보니 진짜 한글은 우리말을 적기 가장 좋은 글자일 뿐만 아니라 세계 언어학자들이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칭찬하는 것을 보고 빨리 우리가 먼저 쓰고 외국인들도 쓰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욱이 셈틀로 글을 쓰는 과학정보시대를 맞이해 한글은 세종대왕이 500년 뒤 기계로 글을 쓰는 날이 올 것을 내다보고 만들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셈틀과 과학정보시대에 아주 잘 어울리는 글자였다. 그래서 한글기계화운동을 하면서 한국어정보학회에 들어가 2004년에 중국 심양에서 남북한과 중국학자들이 모여 학술회의를 할 때에 나는 “한글을 세계인이 쓰는 문자로 만들자.”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 2004년 중국 심양에서 한국어정보통신학술회의를 할 때에 참석했던 때 찍그림. © 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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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5년 한글날 국경일 제정 운동을 하면서 신기남 의원에게 “한글세계화를 위한 의원모임”을 만들게 도와주고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뒤 2006년 노무현 졍부 때에 우리 한말글을 외국에 널리 알릴 길을 찾자고 언론재단으로부터 “외국 한국어 교육 실태 조사” 용역을 따서 중국과 일본, 몽골에서 한말글 교육이 어떤지 실태를 조사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말 인기가 대단했다. 중국에 가니 우리 기업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중국 학생들이 우리말을 배워서 우리 기업에 취직하려고 몰려들고, 일본에 가니 ‘겨울 연가’들 연속극 영향으로 중년 남녀들이 우리말을 배우려고 몰려들고 있었다. 옛날에는 우리가 중국말과 일본말을 배우려고 애썼으나 오늘날엔 그들이 우리말을 배우려고 했다.
▲ 2005년 “한글문화 세계화를 위한 의원모임(대표 신기남” 창립식을 할 때 내가 사회를 봤다. © 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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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부터 한글을 우리가 먼저 쓰고 온 세계인이 쓰는 글자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런 환경을 만들려고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을 하면서 2005년에는 신기남 의원에게 “한글문화 세계화를 위한 의원모임”을 만들게 도와주었고, 여야 의원 60여 명이 한글날 국경일 제정법 안을 내서 통과하고 한글과 한류를 온 세계에 알릴 정책지원을 국회가 하도록 했다. 그리고 2006년 국경일이 된 첫 한글날 큰잔치 사무총장으로 잘 끝낸 뒤에 “중국, 일본, 몽골에서 한글과 한국어 교육 실태 조사”를 하고 인터넷 신문 ‘참말로’에 그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정부에 “한글, 한국어 세계화” 건의를 했다. 그리고 중국 절강성 소흥에 있는 절강월수외대에 가서 태권도장을 만들고 한국어 교수로 활동하게 된다.
▲ 일본 교또의 구청 문화교실에서 김리박 선생으로부터 한국말을 배우는 일본 중장년 남녀들(오른쪽)과 칠판에 나를 환영한다는 글을 쓰고 그들과 내가 함께 직은 모습(왼쪽). © 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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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절강월수외대에 가기로 결심한 것은 “한자를 버리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고 말한 중국의 이름난 사상가요 글쟁이인 노신과, 중국이 한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정치인 주은래가 그곳 소흥에서 태어난 것이 내 마음을 움직여서 그곳에서 한국말을 온 세계인에게 알리는 일을 실천하기 딱 좋은 곳이라고 생각되어서였다. 그리고 한글이 우리 문화를 꽃피게 해주어서 이지만 하늘이 우리에게 한글로 온 인류를 이롭게 만들라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되었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고 한자로 된 국회의원 이름패와 국회 휘장도 한글로 바꾸었고, 신문도 한글로 나오게 된 것도 하늘이 내가 그 일을 앞장서서 하게 이끌었고 한글과 한류 바람을 외국에 일으키라고 이런 일을 하늘이 시킨 일로 보았고 나는 하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다 된다고 믿었다.
▲ 내가 만든 중국 절강월수외대에 만든 태권도장에서 훈련을 하는 중국 학생들(오른쪽)과 밖에서 운동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중국 학생들(왼쪽) 모습. © 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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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권도를 배우려고 오는 학생들에게 한국말 구령에 따라 훈련을 하게 하면서 쉬는 시간에 한국말을 한마디씩 익히게 했다. 그러니 운동도 하고 한국 원어민 사범과 한국말도 익힐 수 있으니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던 중에 학교 당국에서 일본인이 지은 일본어 체험관 옆에 있는 사랑채를 한국어 체험관으로 내가 맡아 학생들을 이끌라고 했다. 그런데 일본인이 지은 일본식 집이고 일본어 체험관은 안채로서 큰데 우리에게 쓰라는 집은 사랑채로서 작았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해 안 쓰려고 했으니 프랑스, 스페인, 일본들은 그들 문화체험관이 있는데 우리만 없기에 그냥 쓰기로 했다. 대신 일본어 체험관 간판보다 우리 간판은 ‘세종학당’이라고 크게 달았다. 그리고 새로 들어선 이명박 정부에 중국이 공자학당 사업을 하듯이 우리도 세종학당 사업을 하라고 건의했다.
▲ 태권도를 배우러온 학생들에게 한국말을 한마디씩 익히라고 태권도장에 써서 붙인 알림 글. © 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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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국력이 크니 그 학교 안에 일본식 집을 짓고 그 울타리 안에 한국 체험관도 들어오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다. 그때 그 학교 일본어과에 연변 조선족 교수가 한 명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일본어과 교수가 되었는지 물으니 일본은 중국과 수교를 한 뒤에 중국인 오백여 명을 일본에 초빙해 일본어 교수를 양성할 때에 자신도 참여했다고 했다. 중국은 세계 곳곳에 공자학당을 세우고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펴려고 나라에서 많은 돈을 쓰고, 일본도 그러는 것을 보고 나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정부에 우리도 세종학당을 세계 곳곳에 만들고 한글과 한국어 보급기지로 삼자고 건의했더니 유인촌 문체부장관이 당장 만나자고 했다.
▲ 일본인이 일본식으로 지은 일본어 체험관(왼쪽)은 큰 안채이고 한국어 체험관(오른쪽)은 작은 사랑채였으나 우리는 국력이 딸려서 따로 체험관을 지을 수 없어 그걸 얻어서 썼다. © 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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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어 체험관 간판은 처마 밑에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한국어체험관 간판은 그보다 더 크게 ‘세종학당’이라고 잘보이게 달았다. 10년 뒤에도 그 간판이 달려있었다. © 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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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업 중이라 바로 귀국할 수 없어 여름방학에 와서 유인촌 장관을 만났더니 미리 건의문을 보고 세종학당 사업은 시작을 했고, 한글문화관(한글박물관) 세우기, 한글주관 만들기 들들 문체부 자체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때 국립국어원을 해체하고 대통령 직속으로 세종 때 언문청처럼 국어청을 만들어 하늘이 준 한글세상 만들기에 힘차게 나서달라, 한글이 태어난 곳인 경복궁 정문에 걸린 한글현판을 떼지 말고,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을 찾아 겨레문화성지로 꾸미고 국민교육장 겸 관광지로 이용하자는 일들도 건의했으나 그건 문체부 권한 밖이라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그 뒤 세종학당 사업이 잘 되어 오늘날 외국 수백 곳으로 늘어나 한말글과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한글박물관이 세워져서 국민교육장으로 빛나고 있어 제안자로서 보람을 느낀다.
▲ 2007년에 국립국어원 최융기부장(오른쪽)이 월수외대에 와서 그 학교 노세걸 부총장(왼쪽)과 세종학당 설립 협정도 맺었으나 그 학교 측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그 일은 이루지 못했다. © 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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