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한자보다는 더 말할 것이 없고 영문을 적는 로마자보다도 더 좋은 글자요 우리말을 적기 가장 알맞은 글자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한글을 쓰지 않고 한자를 더 섬기고 있어서 대학생 때 국어운동학생회를 만들고 한글운동을 시작해 환갑 때까지 우리말을 한글로 적는 말글살이 하는 나라를 만들려고 내 한 삶을 다 바쳤다. 그래서 그런 나라가 될 바탕인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법안을 통과시킨 뒤 2006년에 외국에서 한국말 교육이 어떻게 되는 가 조사를 하고, 2007년에 중국 소흥에 있는 절강월수외대에 가서 중국 대학생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며 외국에 한국문화 알리기에 나섰다.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던 한말글 세계화 뜻 실천과 일어나는 한류를 더욱 세차게 부채질하자는 것이었다.
▲ 중국 절강성 소흥에 있는 절강월수외대 모습. 시립대학인데 학생 수가 11000명이었다. © 리대로
|
2006년 한국어 교육 실태를 조사하려고 중국 절강월수외대에 갔을 때 그 대학 양은천 총장이 “대학생 때 한글나라를 이루겠다는 뜻을 세우고 일생동안 애써서 그 꿈을 이루었다고 들었다. 중국에서도 젊은 날에 청운의 뜻을 세우고 그 꿈을 이루려고 일생동안 애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그걸 실천하고 뜻을 이룬 사람은 드물다. 참으로 대단하다. 우리 대학에 와서 한국어를 교육하며 그 삶과 정신을 중국 학생들에게 심어 달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 대학 외국문화거리에 태권도장을 할 한국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유은종 교수가 나를 좋게 소개해서 한 말이지만 한국에서 일생동안 한국어독립운동을 하면서 멸시만 받았는데 중국 대학총장이 알아주니 고맙고 역시 큰 나라 사람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글 세계화 꿈을 이룰 기회라고 보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학교 안 외국문화거리 입구에 있는 건물 1층에 만든 월수태권도장 모습, 2층에는 인도 요가 체험관이었다. © 리대로
|
그런데 그곳에서 태권도장을 할 사람을 바로 찾기가 힘들었고 마침 용인체육대학을 나와 태권도 6단인 처조카가 있어 직접 태권도장을 열고 그 이름을 ‘월수태권도관’이라고 짓고 한글로 간판을 걸었다. 그리고 그 태권도장 안에는 인천교대 교수를 정년하고 그 학교에 와서 한국어교육을 하고 있는 서예가 박병천 교수에게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을 한 뒤에 태극기와 국기원 기를 걸었다. 이렇게 멋있게 꾸미고 태권도를 배우려고 온 학생들에게 날마다 태극기에 절을 하고 사범의 한국말 구령을 따라서 한국말을 외치게 했다. 외국어대학이여서인지 여학생이 많았는데 젊은 한국 원어민인 사범과 한국말도 익히면서 운동을 하니 학생들도 좋아했다. 모험이었지만 갈 길이라고 가니 하늘이 도와주어서 잘 되었다.
▲ 태극기와 한국 국기원기가 걸린 대권도장에서 중국 학생들이 태권도를 배우고 있는 모습. © 리대로
|
신입생 환영회 때엔 무대에 나가 내가 인사말을 하고 태권도를 배운 학생들이 한국말 구령에 따라서 태권도 품새 동작을 힘차게 보여준 뒤에 태권도 6단인 사범이 발차기로 송판 격파시범을 보여주니 신입생들이 환호했다. 그 행사를 한 뒤에 태권도 인기가 더 올라가서 학교 교정에서 만난 다른 외국인 교수들까지 나를 보면 발차기 시늉을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고 모르는 학생들도 나를 보면 인사를 하니 어깨가 저절로 으쓱했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도 나를 잘 따르고 내 말을 잘 들었다. 고국을 떠나 외국 학교 안에 있는 숙소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렇게 바쁘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중국에 알리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보람도 느끼고 외로운 것을 몰랐다. 중국 학생들 또한 착하고 생김새도 한국 학생과 닮아서 외국 같지 않았으며 방과 후에는 한국문화 체험관을 관리하다보니 학교 당국에서도 나를 알아주어 기뻤고 보람이 있었다. 중국과 한국은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 한글날에는 학과 수업 전에 2006년 국경일이 된 첫 한글날 행사 때 만든 ‘한글세상’이라고 쓴 티셔츠를 입고 내가 가르치는 애들과 함께 한글날을 축하한 뒤에 학과 수업을 했다. © 리대로
|
그리고 학교 당국에서 내게 일본인이 지은 일본식 건물 울타리 안에 있는 집을 한국문화 체험관으로 내줄 터이니 나보고 책임자가 되어 운영하라고 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언어학과는 방과 후에 그 나라 문화를 체험하는 곳이 있었는데 한국문화 체험관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일본인이 지어준 일본식 기와집이지만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문화관은 더 큰 본채인데 한국문화관으로 쓰라는 집은 조그만 사랑채인 것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일본문화관 간판보다 더 크게 한글로 ‘세종학당’이라고 멋있게 간판을 써서 달고 한국문화를 열심히 알렸다. 그리고 전부터 정부에 외국에 한국어 보급에 힘쓰라고 건의했는데 더 자신감을 가지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세종학당 사업을 할 좋은 기회라고 건의했다.
▲ 내가 외국에 처음으로 중국 절강월수외대 한국문화 체험관에 단 ‘세종학당’ 간판(왼쪽)과 내가 한국어를 가르친 중국 대학생들(오른쪽). © 리대로
|
내 건의를 받은 유인촌 문체부장관이 당장 만나자는 회신이 왔는데 바로 가지 못하고 7월 1일 여름방학이 되자 바로 귀국해 “중국이 외국에 ‘공자학당’을 세우고 중국어를 알리듯이 우리도 외국에 세종학당을 만들고 더 한국말과 한국문화 알리기 사업을 할 것, 한글역사문화관(한글박물관)을 짓고 우리 국민은 말할 것이 없고 외국인에게 한글이 훌륭함을 알리고 빛낼 것, 세종 때 언문청이 있었듯이 ‘국어원’을 대통령 직속 ‘한글청’으로 승격시킬 것, 한글날을 더욱 뜻있게 보내기 위해 한글주간을 만들고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한 뒤 세계문화 축제 급으로 한글잔치를 더 크게 할 것,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을 찾고, 한글이 태어난 곳인 경복궁 정문(광화문)에 한글현판을 달아 이 일대를 한글문화 성지로 꾸밀 것”을 강조했다.
그랬더니 문체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겠다면서 세종학당 사업과 한글문화관(한글박물관)건립 들은 바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2007년 한글날이 있는 10월에 중국 절강월수외대에서 전 중국 대학생들을 모아 한국어 말하기, 노래하기, 글쓰기 대회를 하는 한글문화큰잔치를 열고 우리 국립국어원과 중국 절강월수외대 간에 세종학당 설립 업무협정도 맺게 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때에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든 뒤 외국에 한국어 실태를 조사하고 정부에 건의하면서 시작한 세종학당 사업이 힘차게 추진되니 기뻤고 보람을 느꼈다. 또한 입으로는 한글과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훌륭하다면서 그걸 한 눈에 보여줄 곳이 없었는데 정부가 내 건의를 받아들여 한글문화관(한글박물관)을 짓겠다고 하니 고마웠고 힘이 났다.
▲ 2007년에 중국 절강월수외대 노세걸 부총장(왼쪽)과 한국 국립국어원 최용기 국어진흥부장(오른쪽)이 중국 절강월수외대에서 ‘세종학당’ 설립 업무협정을 맺었다. © 리대로
|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꿈꾸는 자가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간절하게 바라고 추진히니 되는 것을 보면서 하늘에서 서종대왕과 애국선열들이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같은 모든 일들이 나 같은 일반 백성이 말하고 나서는데 정부가 들어주고 많은 국민이 공감하고 지지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모험 같았지만 한글이 훌륭하고 우리 겨레가 가야 할 길을 가자고 하니 공감하고 함께 가는 사람이 많았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나가 바라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한글이 우리나라를 세계 으뜸 국가로 만들어 줄 것이란 믿음이 더욱 굳어지고 죽는 날까지 그 꿈을 이루는데 힘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단단히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