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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피해자와'친하면' 죄가 없어지나
[정문순 칼럼] 권력 언어에 오염된 노동당 경남도당 당기위원회
 
정문순   기사입력  2017/01/15 [15:09]

의적 홍길동은 성폭행을 통해 태어났다. 그를 낳기 전 아버지 홍 판서가 낮잠을 자다 용 꿈을 꾸고 나서 안방에 들르니 마침 부인이 있었다. 부인을 본 판서는 갑자기 친해지고싶어서 손목을 잡아끌다가 상대로부터 대낮에 상스럽게 무슨 짓이냐며 면박만 당한다.
 
부인이 속 좁다고 한탄하며 나오던 판서의 눈에 마침 지나가던 시비 초란이 들어오자, 부인 대신 친해진다’. 홍길동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왔다.(홍길동전) ‘친하다는 성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 있지만, 맥락을 뜯어보면 이처럼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유명세를 이용하여 출판사 직원 등 문단의 여성들을 성추행에 가깝게 희롱한 사실이 들통 난 소설가 박범신은, 성폭력 가해 혐의자들이 빼도 박도 못하는 처지에서 흔히 하는 변명을 입에 담았다.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친하다라는 수평적 관계를 떠올리는 말로써 실은 전혀 평등하지 않고 일방적인 행동을 숨기려고 했다는 점에서 박 씨의 변명은 말을 정밀하게 써야 하는 작가답지 않게 치졸하고 야비하기까지 하다.
 
권력은 말의 뜻을 뒤집어놓는 데 능란하다. 자유, 법치, 법질서, 애국, 안보, 소통 따위 말은 나쁜 권력이 정권을 잡았을 때 여지없이 왜곡 당했다. ‘친하다는 말도 권력자의 언어이며, 성폭력뿐 아니라 모든 폭력적이고 위계적인 상황에서 두루 쓰일 수 있다. 왕따 가해자도 피해자와 친해지고 싶어서 괴롭혔을 뿐이라고 변명한다.
 
문제는 왕따 가해자와 피해자가 친한 사이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 당연한 말이지만, 따돌림이나 괴롭힘은 당사자들이 서로 잘 아는 사이에서 일어나지 교류가 없거나 모르는 관계에서 일어날 수 없다. 왕따 가해자가 알고 보니 피해자의 가장 친한 친구로 드러나는 경우는 허다하다.
 
남들 눈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친한 사이로 보인다는 사실이 가해자로서는 얼마든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이 되어준다. 그러나 가해자의 그물에 걸려든 피해자로서는 친한 사이로 보이는 수렁을 빠져나오기 힘들다. 거미줄에 걸린 희생자가 자신을 감싸 안고 토닥토닥 두드리는 거미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권력이 작동하는 관계는 그런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자를 쳐죽이고 싶을지언정 그와 진짜로 친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한 공간에서 겉으로는 사이 좋은 척 하지 않을 수 없고 실제로 도움을 받은 적도 있다는 점이 피해자의 숨통을 조인다.
 
나의 경우, 성희롱 가해자와의 합의가 결렬되면서 사건을 노동당 경남도당 당기위원회에 회부하자 가해자는 말을 바꾸었다. 나와 친한 사이이며, 내가 여자 친구 하고 싶다고 먼저 졸라댔단다. 나와 엇갈리는 가해자의 진술을 내게 확인해 주지 않은 도당 당기위도 우리가 친한 사이로 보이니 가해자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결론 지었다. 동료일 뿐 친구가 아니라는 내 주장은 배척되었다.
 
친한지 안 친한지 하는 사적 관계까지 나는 강제로 규정당한 셈이다. 쟤들은 친한 사이인가 봐. 그럼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가해자한테만 잘못을 물을 일이 아니잖아. 경남도당에게 친하다는 판단이 필요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졸지에 나는 피해자이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에게 피해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부 가해자가 되어버렸다. 정신분열을 일으킬 듯한 결론. 나는 나를 징치해야 나를 살릴 수 있다. 관계를 함부로 규정당한 것도 방망이질을 당한 기분이지만 친한 사이라면 희롱이 일어날 수 있다는 판단은 성폭력이 무엇인지조차 모름을 실토하는 것이다.
 
그동안 친하다는 것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내게 희귀한 기회를 준 노동당 경남도당 당기위원회와 가해자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그 사유가 얼마나 깊었던지 신경정신과 문턱을 넘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여성 동료들이 결코 내 편이 아니라는 당연한 진리도 이번에 덤으로 얻었다. 그들도 같은 조직에 있는 한 가해자와 친하게지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해자의 영향력을 봐도 나와 비교할 수 없다. 한 여성 당직자는 두 사람 간의 사적인 일이라며 자신과 선을 그었다.
 
성평등이나 페미니스트 용어를 입에 달고 사는 개인이나 조직이라고 해서 곧이곧대로 믿을 것도 아니며 사람은 천 마디 말이 아니라 자신과 연관된 작은 행동 하나로 평가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동의 진리임을 새삼 확인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인지 모른다.
 
경남도민일보에 게재한 글을 손 본 것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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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1/15 [15:0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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