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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힘, 지역에서 활짝 꽃피다
[정문순 칼럼] 지역에서 확인하는 생활정치의 실현, 시민들은 승리
 
정문순   기사입력  2016/12/11 [18:55]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 소추안 가결로 이끈 원동력은 지난 1112일 서울 집회로 평가받는다. 이날 켜진 1백만의 촛불은 집권자가 국민들 마음으로부터 탄핵 당했음을 알리는 확실한 징표로 두고두고 쓰였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의 정당성을 설명해 주는 근거로서 그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었다. 초유의 국정공백이니 국정혼란이니 하는 등의 국가적 위기를 무릅쓰고서라도 최고 집권자가 물러나야 하는 이유를 말할 때 언제나 백만 시위가 거론되었다. 대통령 지지율 4%, 최근 여론조사 대상 1천 명 중 20대의 대통령 지지율 0%라는 경이적인 통계보다도 백만 시위대의 위력이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이날은 서울 총궐기 집회였기 때문에 전국에서 서울로 모여들었다. 나도 그날 아침 일행들과 출발하여 충청권에서 벌써 막히던 도로를 가까스로 뚫고 진입하여 오후부터 1백만 대열에 속해 있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대거 서울에 집결함에 따라 지역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마저 서울에 갔을 정도였다. 대통령 하야의 정당성을 웅변하는 근거에 나도 1/100만을 기여한 셈이니 부듯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내가 감당해야 할 출혈이 적지 않았다. 나는 그날 시위대에 눌려 일행들을 놓치고 혼자가 되어버렸다. 일행을 찾으려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때는 광화문이 한창 인파로 폭발할 지경이던 시간이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숨쉬기도 벅찰 지경이니 통과는 불가능했다. 나는 사람 떼를 왜 인파라고 하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결국 새벽녘 가까운 시간에야 가까스로 빠져나왔지만 고속버스마저 거의 다 매진이었기에 하마터면 서울을 못 떠날 뻔했다. 
 

▲     © 정문순


 백만 시위로 서울 광화문 일대가 미어터진 그날, 지방이라고 해서 집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던 10월 말부터 전국 각 지역에서는 주말을 포함하여 일주일에 두세 차례 집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토요일인 1112일도 정례적인 촛불집회가 이어지던 날이었다. 서울 촛불과 상관없이 지역 시민들은 그날도 촛불을 밝혔다.

서울에 가서 혼이 나고 돌아온 지 일주일 후 나는 내가 사는 지역에서 열리는 시국대회 현장에 있었다. 1만여 명이 모였다고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정확한지는 알 수 없었다. 집회가 마무리될 때까지도 사람들이 계속 불어났다. 시청 앞 원형 잔디밭은 이맘때면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그 넓은 공간을 한 달 넘게 독차지하는 때다. 평소에 시민들은 교통 체증이 가장 심한 도심 한복판에 둘러싸인 그곳을 거의 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만은 예외였다.

그날 전국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은 150만 명이라고 집계되었다. 서울 100, 나머지 지역 50만이니 서울을 빼고 내가 사는 지역에서 벌어진 것과 비슷한 규모의 시위가 49개 더 나온 셈이다. 사상 최대 규모였다. 그 다음 주는 비가 내리고 한파가 몰아쳤음에도 촛불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집회에서 돌린 성금 모금함에는 매회 700여만 원이 모였다. 전국적으로 집회 참여자 수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가 진행될수록, 그리고 박 대통령의 담화가 새로 나올 때마다 기록을 경신했다.

촛불집회의 백미는 시민들의 자유발언이었다. 보통의 경우 집회는 사회단체 대표들 발언을 행사 앞부분에 배치하는 것이 관례지만 이번에 주최 측은 갈수록 그 비중을 줄이고 시민들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 본 경험이 없는 시민들은 조직화되고 학습으로 단련된 단체 대표들 못지않게 시국을 보는 안목이 예리했고 촌철살인의 풍자 솜씨도 일품이었다. 오히려 관례적이고 딱딱하고 재미없는 사회단체 대표들의 발언과 달랐다. 자유발언 신청자들이 줄을 잇는 바람에 그것을 끊는 것이 주최 측의 고민이었다. 특히 청소년들과 40대 주부들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한 주부가 무대 위에 오를 자신이 없어 남편에게 대신 읽게 한 박 대통령 풍자는 한동안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히트를 쳤다. 남편이 여러분,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얼굴에 금실 집어넣어 주름 잡아당기는 수술이나 해야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청중들은 그러면 안돼!”라고 답하는 등 문답식 야유를 이어가는 재치는 집회를 취재한 기자들이 기사에서 인용할 정도였다. 또다른 주부는 자신을 닭띠라고 하면서 하필이면 닭띠로 태어난 것이 후회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순실은 부끄러운 비선실세지만 자신은 당당한 비만실세라고 했다.

한편 청소년들의 정치 비판은 기성세대를 부끄럽게 할 정도로 날카로웠고 정확했다. 한 청소년은 박근혜 하야 집회가 비폭력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면 안된다고 호소하며 어른들을 놀라게 했고, 어떤 청소년은 또래들에게 집회 후 별도의 청소년 집회를 갖자고 즉석에서 제안하기도 했다. 웬만한 것은 포기하거나 접고 살아가는 소시민이 된 어른들에 비해 청소년들은 담대했고 열정이 넘쳐났다.

평범한 시민들의 촌철살인 발언은 똑똑한사회단체 대표 급과 확실히 달랐다. 탄핵이 가결된 다음날 열린 시국대회에서, 지역의 사회단체 원로급 인사는 박 대통령에게 자진사퇴를 요구해서는 안되며 퇴직금이나 연금을 못 받게 하려면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결정 나야 한다며 자신의 주장에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이 자진사퇴한다고 한들 그건 제 발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힘으로 끌려나오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민의 손이 아닌 일개 국가기관에 대통령의 최종 운명을 맡기자는 주장이 편협하다는 것을 모르는 발언이었다.

그와 달리, 수만 명이 모인 집회의 단상에 올라 여유로운 재치와 단호한 풍자 실력을 선보인 주부들이나 학생들은 지역 사회에서 오다가다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 이들이었다. 평범하게만 보이던 이웃들이 얼마나 정치의식이 높은지 눈이 떠지는 순간이었다. 나 혼자만 현실에 분노했고 세상을 탄식했던 게 아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그들이 더 높았다. 물론 집회 현장에서 민주주의의 열정을 토로하는 그들은 집에 돌아가면 다시 일상의 삶을 살아야 하는 주민이고 이웃이 되었다.

실질적인 쓰임새는 없이 랜드마크로만 존재하던 시청 앞 잔디 광장은 활짝 열린 민주주의의 학습장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매연을 내뿜는 차량 행렬이 독차지했을 도로도 짧은 시간이나마 촛불 든 시민들이 접수했다. 또 집회는 오래간만의 가족 나들이가 되기도 했고, 아빠와 엄마가 자식들에게 시민들이 왜 대통령에게 분노하는지 교육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어른들이 너도나도 멋진 발언을 하는데 아빠는 왜 가만있느냐며 등 떠미는 어린 자식에게 쪽 팔리지 않으려고아빠가 마이크를 잡고 멋진 아빠임을 증명하는 기회도 되었다. 퇴근 후 맥주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을 접고 슬리퍼 꿰고 산책하듯 나왔다가 시민들의 자유발언이 주는 재미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다 어느 단체에서 나눠주는 어묵과 찐빵으로 추위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일상의 민주주의 실천이 가능하려면 서울이 아니라 시민들이 각기 살아가는 생활 공간에서 집회가 열려야 한다.

언론에서는 구름 인파가 몰려든 서울 집회의 위력을 상세히 보여주고 나서, 지방에서도 여기저기서 촛불이 타올랐다고 간략하게 보도했다. 그러나 집회에 관한 한 지방은 서울의 곁가지이거나 중앙에 종속된 곳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막강한 위용을 쪽수나 시위대의 청와대 포위 장면을 통해 보여주는 데서는 지역이 서울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 대신, 민주주의가 관념적인 정치 구호만이 아니고 주민들의 일상적 삶과 밀착해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은 지역에 켜진 촛불들이다. 생활 민주주의는 전국 각 지역의 촛불 집회에서 활짝 꽃피어났다. 이름부터 엄숙하고 단단한 느낌의 시국대회는 어느새 흥겹고 즐거운 문화행사로 바뀌었다.

지역에서 시민들의 민주주의 축제로 승화한 촛불집회는 탄핵 정국이나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성취로 남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헌재에서 탄핵 심판이 어떻게 결론 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시민들은 승리했다.

iCOOP소비자활동연합회 시민기자단 블로그에 게재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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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2/11 [18:5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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