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국민가수? 혹자는 그를 '그레이트 김정구 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7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건국 이후 최고의 코미디언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김국진이 1위를 차지했다. 비결은 간단하다. 그가 ‘당시에’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조사를 벌이면 비슷한 원리에 따라 순위가 도출될 것이고, 구봉서나 배삼룡 같은 이들은 아무래도 제 영향력에 비해서는 뒷전에 쳐지기 쉬울 것이다. ‘가수’로 부문을 바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론가나 저널리스트, 연구자를 빼고 일반 국민들에게만 투표를 맡긴다면 말이다. 순위야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기록과 기억이 어떤 분야에서든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다. ‘학술’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고하는 시간이 짧아질수록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예술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최고의 스타 김정구와 민중의 희망 박헌영 이 칼럼의 제목은 ‘한국 현대사 OST'지만 오늘은 ‘근대사’에 있었던 음악을 끄집어 내려고 한다(왜 나는 제목을 ‘근현대사’라고 짓지 않았을까). 일제시대는 나라 없는 민족인 조선인들이 ‘국민가수’를 가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김정구다. 1916년 함경도 원산에서 난 김정구는 연주에 능했던 가족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연스레 가수로 성장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개신교 신자로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고, 일찍 학업을 접고 양치기나 물지게꾼을 해야 할 만큼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음악이론과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다. 충무로 대중음악계에 뛰어든 그는 <서울감상곡>, <항구의 선술집> 등의 곡을 취입하여 장안의 스타로 떠올랐고, 제법 거금을 벌며 철마다 세벌쯤의 양복을 맞추어 경성 최고의 멋쟁이로 꼽혔다. 그렇다고 그가 ‘가오’만 한껏 잡을 줄 아는 가수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재즈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재담과 제스춰였다. 아버지의 소질을 물려 받았는지 만담에 뛰어났던 데다가 그의 노래는 대화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춤을 추는 것은 물론, <왕서방 연서>를 부르며 이가 빠진 중국인 복장을 하고 세태를 풍자하기도 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이러한 김정구를 인기연예인에서 민족의 대표 가수로 격상시킨 노래다. 이 곡은 작곡가 이시우가 두만강 유역에서 독립군의 아내를 우연히 만나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졌었다. 그러고 나서 정소월이라는 가수가 처음 불렀다가 이시우가 정식음반으로 남기면서 김정구에게 노래를 맡겼고, 김정구가 작곡가 김용호에게 부탁해 가사를 3절까지 늘렸다는 사연이다. 그러나 이를 뒤엎는 주장이 역사학자 임경석을 통해 소개되었다. 그는 항일운동가이자 조선 공산주의의 거두였던 박헌영의 일대기를 정리하면서 <눈물 젖은 두만강>에 얽힌 증언을 담았는데, 증언자는 원경 스님으로 박헌영의 아들이다. <동아일보>에서의 퇴사와 <조선일보>에서의 해직 등을 거치며 끊임없이 혁명운동을 해온 박헌영은 1925년 부인 주세죽과 함께 경찰에 체포됐다. 모진 고문을 당했던 박헌영은 재판정에서 정신이상 증세를 일으키며 난동을 부리는 등(이것은 의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병세가 심화되었고, 1927년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병원에 입원한다. “눈을 뜬 채 등골이 뽑히고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으니, 그의 아내가 안은 것은 남편의 잔해였다.”:소설가 심훈이 묘사한 그때의 박헌영이다. 참고로 심훈의 소설 <동방의 애인>은 박헌영, 주세죽 부부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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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세죽, 박헌영 부부. 아기는 딸 박 비비안나. 허나 주세죽은 나중에 사회주의 활동가 김단야와 사랑에 빠지고 둘은 결별하게 된다. 일제 말기 박헌영과 잠깐 만난 어느 처녀는 그의 아들인 원경 스님을 낳고 집으로 끌려 내려갔으며, 박헌영은 윤레나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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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8월 두 부부는 바닷길을 통해 소련으로 탈출한다. 그때 영화촬영차 두만강에 있다 소식을 들은 작곡가 김용호가 두만강변에서 영감이 떠올라 노랫말을 썼다는 것이 원경 스님의 주장이다. 가사에 나오는 ‘그리운 내 님’은 박헌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가 뚜렷하지 밝혀지지 않았던 작곡가 김용호는 다름아닌 김정구 친형 김용환의 다른 이름이었다. 원경 스님은 또 1963년 라디오에 출연한 김정구가 <눈물 젖은 두만강>에 얽힌 이야기를 친형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노래는 널리 불려지고, 박헌영은 잊혀졌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중·노년층 사이에서 끊임없이 불려져 왔던 국민가요이며, 강산에의 <라구요>로 또 다른 울림을 얻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노래가 ‘빨갱이 두목’을 그리워하여 작곡된 것이라니! 대반전이 따로 없다. 더구나 박헌영을 미제의 스파이로 몰아 처형한 북한에서도 이 노래에 담긴 역사성과 철학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가. 사실 나는 해방 이후 박헌영의 행적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이다. 그는 공산당계의 헤게모니를 무리하게 관철시키기다가 좌익 내부의 협동에도 큰 지장을 주었으며, 공산당계의 신전술에 따라 민중들이 궐기했을 때는 이미 이북으로 탈출해 있었다. 남로당의 봉기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국토완정론’에 힘을 실어주었고, 그 결과 일어난 전쟁은 도리어 이승만의 권력을 더 굳건히 다져 주었다. 북한 역시 건국 때 갖고 있었던 얼마간의 다원성과 역동성을 잃어버렸고,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세워지면서 그 자신부터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당시 북한은 박헌영이 연희전문 창립자 원두우의 아들 원한경을 만나 미국의 스파이가 되었다면서, 일제 말기와 해방정국기 그리고 한국전쟁기에서 보여준 행동들이 죄다 미국을 위한 작전이었다고 우겨댔다). 그러나 일제 말기 우익 계열의 민족지도자들이 은둔이다 문화운동이다 심지어는 친일이다 하면서 침묵하거나 훼절하던 일제 말기에, 박헌영이 지하에서 부단히 독립투쟁을 이어가며 ‘그리운 내 님’으로서 조선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해방정국기에도 미군정은 그를 여운형, 이승만, 김구와 같은 반열에 선 대통령 후보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권력투쟁에 소질이 있어서 좌익계의 다른 라이벌을 제치고 또 우익의 견제와 탄압을 받았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명망가 중심의 정치운동에 갇히지 않고 노동자, 농민의 운동을 규합하고 조직하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줬다. 조선공산당의 영수, 북한의 부수상으로 나타나 권력을 잡는 듯했으나 결국엔 숙청의 대상이 되어 사라졌지만 말이다. 남과 북 모두에게 잊혀진 인물이 박헌영 뿐이랴. <눈물 젖은 두만강>은 그들 모두를 위한 노래이다. 나아가 제국주의와 전쟁, 가난과 독재의 고난에 부딪혀 나갔던 조선 민중의 노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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