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외면하는 정치인들과 그들만의 개혁

  중산층 그리고 그 이하 서민들이 구제금융 한파 속에서 겪어야 하는 삶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고, 오히려 이 시기를 틈타 그 기득권을 더욱 확장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착취와 부패의 구조를 기반으로 성장해온 한국의 재벌을 비롯한 자본가 층이 경제 침체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이익과 부의 손실을 막고 오히려 외형적 확장을 추구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목도할 수 있다.
  그 속에는 본분 상 절대로 그래서는 안될 사람들 또한 대열의 맨 앞에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 '정치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정치인'들이다.
  정치권력의 정통성과 정당성은 바로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상식적 이치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삶, 바램,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당리당략의 정쟁(政爭)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의 정치개혁을 둘러싸고 반복되었던 여야의 대립과 타협은 고승덕 변호사의 한나라당 후보사퇴와 지난 3일 정부조직법을 둘러싼 여당의 '날치기'로 인해 다시 강경한 대립양상으로 치닫고,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는 김대중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규정지어 이에 대한 민주주의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원외 투쟁일정을 잡아놓고 있다.
  솔직히 이들의 싸움에 고개 돌려 관심을 갖고 그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들의 싸움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자기들끼리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야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변하지 않는 지겨운 풍경이 바로 여·야의 정치계산적 정쟁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의 존재근거가 정권창출에 있다고 했을 때 정치적 득실을 따지며 그 행보를 취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권의 대립과 타협의 과정은 국민의 삶, 국가와 사회의 나아갈 바에 대한 대의(大義)를 전제하고 있어야 하며, 그에 대한 논쟁과 토론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정쟁은 그러한 대의에 대한 논의는 전무한 채 정국의 주도권장악과 권력장악만을 위한 '이성 잃은 싸움판'에 불과하다.

  4월 9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는 8월말까지 내각제 논의의 전면중단을 합의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권내의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조가 '내각제 개헌'논의로 인해 깨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김대중대통령과 김종필총리의 내각제 개헌을 약속으로 한 '한배 운명'이 그야말로 대선 승리를 위한 얄팍한 눈가림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각제 논의 중단은 얄팍한 정치술수의 위기가 현 정권의 안정에 불안요인이 되자 나름대로의 살길을 찾기 위한 또 하나의 눈가림인 것이다.
  그러나 현 정권 최대의 위기사안이 될 수 있는 내각제 논의에 대한 눈가림을 한나라 당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권력구조에 대한 논의가 공론화되어 내각제 개헌에 대한 여당의 분명한 입장과 계획을 듣기 전에는 어떠한 정치개혁에 관한 논의도 진행하지 않겠다고 못박고 있다.   2000년 총선의 정치일정을 앞두고 선거법 등의 정치개혁법 논의는 현재 6월말로 연기된 상황이지만 내각제 논의와 맞물려 정치개혁에 관한 여야간의 논의는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이회창 한나당 총재는 특히 임기 말 개헌은 여당의 장기집권 음모라고 반대하면서, 내각제 개헌이 올해 안, 16대 총선 전에 이루어진다면 검토할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여야간의 싸움을 보면서 우리는 기가 막힌다. 그들간의 싸움에 국가의 나아갈 바에 대한 대의는커녕 국민의 의사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내년 총선과 그 다음 대선을 위한 이해만이 난무할 뿐이다.
  '권력구조의 문제가 확정되어야 그에 알맞은 선거구 개정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 대체로 대통령제에서는 소선거구제를 채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권력구조와 선거구의 유형이 필연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권력구조와 선거구개정에 관한 논의는 별도로 진행할 수도 있다'라는 식의 논쟁이라면 우리는 여러 국가의 정치제도에 대한 사례와 한국적 상황에 대한 토론을 통해 적합한 길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내각제와 대통령제의 장, 단점에 대한 논의들을 여론화시키고 국민들의 이해와 참여가 가능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논쟁이라면 발전적이고 건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여야간의 논의는 그야말로 자기들끼리의 싸움이기에 우리가 낄 틈이 없다.

  정치인들은 '개헌'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이 국민의 의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완전히 망각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국민이 풍부하고 진실된 정보를 가지고 그 의사의 향방을 정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고 돕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는 사실은 애초에 몰랐던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선거구에 관한 논의 또한 결코 단순히 소선거구제냐, 중·대선거구제냐 하는 식으로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선거구 개정에 관한 논의에 선행되어야 할, 혹은 동반되어야 할 정치개혁의 과제들이 중요하게 제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재 일반적으로 제기되고 있듯이 여권이 추진하고 있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정당의 당내 민주화가 확보되지 않는 이상 현재의 보스중심의 정당정치를 극복할 수 없을 거라는 문제 등이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한 선거구에서 1인의 당선자를 뽑는 소선거구제는 다수당의 집권을 안정적으로 보장해 정국의 안정을 유도하는 대신 많은 死票를 낳기 때문에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의 문제, 즉 집권세력에 대한 정당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특히 단순 다수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100표를 획득하여 당선된 사람이 99표를 얻고 떨어진 사람에 비해 그 대표성과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의 문제이다. 중·대 선거구제 또한 국민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반면, 소수당의 난립문제와 선거절차의 효율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정치개혁의 논의가 한국 정치폐단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정치민주화를 위한 제도확립의 차원으로 진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여야 논의는 총선 승리를 위한 단기적 지침, 또는 정치협상을 위한 카드 이상이하도 아니다.
  더욱이 우리가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되는 것은 아무리 제도가 훌륭하다하더라도 현재의 정치인들이 정치권에 존재하는 한 실질적인 정치개혁은 요원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3일날 또다시 반복되었던 국회의 '날치기 현장'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유치하고 몰지각한 싸움판으로 변해버린 국회와 그래도 잘났다고 끝까지 큰소리 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보고 어느 누가 정치제도의 개혁에 희망을 걸겠는가? 입헌민주주의 체제에서 사회정의의 문제를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인 '法'을 입안하고, 그 질서를 세워야 하는 현장에서 난무하는 무질서와 폭력은, 단지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갖게된다'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무언가 참담하면서도 치미는 분노를 어쩔 수 없는, 우리사회에 대한 절망을 갖게 하고 만다.
  김대중 대통령 또한 이러한 현실을 깨달았는지 '젊은 피 수혈론'을 주창하고 있다. 현재의 정치인들로는 가시적인 개혁의 성과물을 얻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러나 이러한 '젊은 피 수혈론' 또한 고승덕 변호사의 한바탕 소동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문제점부터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정치인이 이리저리 줄을 대다가 정치에 입문도 하기 전에 공개석상에서 '역시 혈연은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라는, 참 듣기에도 민망한 변명부터 들어야 했던 것이다.
  고승덕 변호사와 같은 사회 기득권세력의 정치입문 또한 '젊은 피 수혈'에 대한 효과에 의문을 품게 하지만 더욱이 우리의 마음을 씁쓸하게 하는 것은 80년대 운동권 출신 선배들의 '정치권 줄서기'의 모습이다.
  80년대 운동권 출신 선배들이 지금의 더러운 정치판에 어떻게 해서든지 들어가려 한다면 이는 80년대의 운동성과 도덕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운동경력을 밑천으로 자신을 상품화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시민단체나 운동단체의 운동가들은 자신의 독자적인 대오, 그 질서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 만약 시민단체나 운동단체의 젊은 인력들이 정부의 '젊은 피 수혈'에 편입되어 버린다면, 그 동안의 민주화 투쟁을 통해 시민사회가 권위적 국가에 종속되지 않고 시민사회 나름대로의 담론과 정치를 만들어가고자 했던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정치인의 물갈이는 대안적인 독자적 질서의 확립을 통한 견제와 경쟁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현 정치권에의 부분적 편입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목숨을 걸고 계속되었던 투쟁과 노력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 흐름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수 없는 좌절과 패배의 역사가 이를 포기하고 지금의 썩은 정치판에 문을 두들기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이제 포기한다면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는 지금 수준에서 만족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들에게 도덕과 정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오히려 어불성설일 수 있다. 그러나 입헌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국가의 정치인들은 윤리와 도덕, 그리고 정의를 실현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정치인들은 국민에게 있어 가장 혐오와 불신의 대상이며, 한국 정치사회의 긍정적 발전에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다. '개혁대상 1순위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추진하고 있는 개혁'의 문제점은 사실 이제는 지겨운 논평이 되어 버렸다.
  지하철 노동자들의 생계보장과 사회경제적 분배문제에 관한 투쟁은 국민의 정부에서도 역시, '국민의 발을 볼모로 하는 불법적이고 이기적인 행위'라고 온 언론과 정치권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했으며, 결국 공권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야 했다.
  그러나 국민의 민생과 복지를 볼모로 자신의 당리당략만 챙기려 하는 국회의원들, 툭하면 의정 활동 중단, 툭하면 날치기, 툭하면 과시적인 원외 투쟁을 일삼는 정치인들은 안전하게 법의 보호 아래서 수없이 불법을 자행하며 권력의 대열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추잡한 행위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마땅한 일이고 당연하게 되어버린 현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정치현실이다.

정치부 안성윤 수습기자

▣여성정치,달나라 딸세포의 가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