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왜 대한민국 군대는 괴물이 되는가?
[김종대의 안보설명서] 불순 세력이 존재한다는 그릇된 신념부터 버려야
 
김종대   기사입력  2014/10/24 [01:14]

이지메와 이방인의 탄생

 

가끔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이 10년 또는 20년 전에 일본에서 사회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접하면 왠지 꺼림칙하다. 일본은 왜 사회의 부정적인 면에서조차 ‘우리를 앞서가는가’라는 의문에 이어 우리는 왜 일본과 ‘다른 길을 걷지 못하는가’라는 탄식마저 나오게 된다. 일본에서 10년도 더 된 책이 이제 와서야 국내에 번역되는데, 지금의 한국 사회를 생중계하는 듯해 경악스럽다.

 

사회학자 나이토 아사오가 지은 『이지메의 구조: 왜 인간은 괴물이 되는가』는 학교나 군대 같은 폐쇄된 공간에서 왜 인간이 동료에게 가학적인 공격 성향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개념적이고 원리적인 고찰이다. 여러 유용한 개념이 나오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황당하게 만든 것은 이지메 피해자에 대한 심리 묘사다. 집단 따돌림이나 폭행을 당하는 피해자가 “경찰을 부르겠다” 또는 “정식으로 고소하겠다”라고 하면 가해자는 폭력을 멈춘다. 그런데 대부분의 피해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법의 도움을 받는 걸 수치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폭행을 참고 견디는 것이 미덕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고통을 인내함으로써 스스로 강해진다고 믿는다.

 

이걸 저자는 ‘강인함의 전능’을 확보하려는 심리 상태라고 말한다. 지금은 약해서 가혹한 폭행을 당하지만 이를 견디고 나면 어느새 강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외부의 힘을 빌려 집단 질서에서 벗어나는 건 신성모독이다. 그래서 기꺼이 폭행과 모욕, 조롱, 놀림을 당한다. 문제는 학교 역시 개인이 집단 질서에 벗어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런 폐쇄적 분위기에서 이지메의 대상이 된 학생들은 ‘감정 노예’로 전락해 수없는 착취와 모욕과 학대를 감수한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군대도 마찬가지다. 그 속에서 거의 모든 피해자는 외부의 도움을 얻고자 하는 용기가 완전히 사라진다. 결국 대부분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선택하지만, 죽음에 이르러서도 집단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민속학자 아카사카 노리오의 『누가 왕따를 만드는가: 배제의 현상학』은 현대 문명사회에 대한 우울한 통찰이다. 책에 따르면 근대 이전의 사회가 ‘소화하는 사회(흡수형 사회)’였다면 지금은 ‘구토하는 사회(구토형 사회)’다. 과거 일본의 민속 축제는 첫째 날에 거지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시작되었다. 신사(神社)에서는 거지와 평민, 귀족이 알맞은 자리에서 모두 배불리 먹고 즐겼다. 그런데 현대의 축제에서는 이게 불가능하다. 깨끗하고 즐거운 축제를 즐기려면 거지는 추방되어야 한다. 나 같은 40~50대만 하더라도 동네에서 상을 당하면 부랑인들이 상여를 멘 후 장례가 끝나면 먹을 것을 제공받는 장면을 보면서 자랐다. 거지가 와도 박절하게 대하는 법이 없이 마당 한편에 상을 차려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 시절까지만 해도 모든 이를 배려하는 공동체의 통합성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거지는 깨끗한 지하철을 더럽히고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기 때문에 단속하거나 추방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부랑인을 경범죄로 처벌하는 법이 1969년에 제정되었는데, 이유는 다름 아닌 공동체의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법이 제정된 직후에 중학생들이 노숙자에게 돌을 던지거나 집단 폭행을 가해 많은 노숙자가 죽고 다쳤다. ‘더럽기’ 때문이었다. 깨끗한 사람들이 사는 균등한 공동체가 이상적인 문명사회의 이미지가 되고 난 다음, 이에 부합되지 않는 개인은 이방인으로 배제되기 시작했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정신병원과 특수 시설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저자는 정신병자를 수용하는 위생법이 제정된 1970년, 일본 사회에 이지메가 증가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국가, 학교, 가족, 군대라는 집단은 신성하기 때문에 이를 더럽히는 이방인은 배제되어야 하고, 이들을 수용하는 별도의 공간이 생겨나야 했다는 주장이다. 더러운 이방인은 예전에 우리 곁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어느새 공동체의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분리되고 제거된 것이다. 주로 개인을 학대하는 공동체의 논리는 간단하다. “더럽다”, “기분 나쁘다”라는 것이다. 요즘 학교나 군대에서 개인을 학대하는 가해자들이 대부분 제시하는 이유다. 이를 합리화하고, 더러운 이방인이 원래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범죄심리학과 정신의학까지 동원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가고 있는 방향이다.

 

결코 집단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집단의 신성함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가혹 행위를 당한 피해자를 이중으로 처벌한다. 우선 “피해자 자신에게 어떤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집단의 암묵적 선입관이 작용한다. 물론 이유는 있다.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다든지, 행동이 느리다든지, 청결하지 못하고 학습 능력이 뒤떨어진다든지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즉, 공동체의 깨끗한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개별적인 특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집단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가혹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피해자를 성격 이상자, 정신적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몰고 간다. 문제는 현대의 정신의학이 이런 가혹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된다는 것이다. 자폐증이나 우울증, 정신착란을 일으킬 수 있는 비정상인은 잠재적 범죄자와 동일시된다. 뇌 과학, 정신의학은 범죄심리학과 결합되면서 현대 사법 체계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고, 비정상인은 당연히 배제되거나 제거되어야 한다는 사회 통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국방부 병영문화혁신위원회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군대 내의 구타와 가혹 행위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뇌과학자를 대거 투입해 문제 있는 병사를 식별하고 배제하라는 혁신 과제가 마구 속출하고 있다. 여전히 ‘맞을 짓을 하는’ 또는 ‘맞을 만한’ 병사를 제거하고 나면 군대라는 집단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고 모두들 기대하는 눈치다. 정상인들로 이루어진 균등한 군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집단에 대한 문제 제기는 생략되거나 축소된다. 즉, 군대는 여전히 신성한 집단이기 때문에 문제는 개인에게 있는 것이고, 해결책 역시 개인을 제거하는 쪽으로 모아지는 것이다. 결코 집단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여기에 부합하는 한 가지 사례가 있다. 28사단에서 윤 일병이 구타로 사망하고 여론이 온통 군을 질타하는 쪽으로 흘러가자,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가 8월 중순 국내 일간지에 “군은 질책의 대상이 될지언정 결코 모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라는 제목의 광고를 게재했다. 이들은 “마구잡이식 군 때리기는 군을 넘어지게 하는 독약이 된다”, “군 지휘관들을 호통치며 면박 주는 행위는 60만 국군과 1천 만 예비역을 좌절케 하고 적을 이롭게 한다”, “우리 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전투력이 훼손되면 좋아할 사람은 김정은 집단뿐이다”라며 국민들에게 “군에 대한 회초리를 거두라”라고 주문했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군대는 신성한 국가 권위의 표상으로서 ‘하늘이 내려준 집단’이고 시민사회의 영역을 초월해 특수한 권력관계로 움직이는 ‘성스러운 집단’이다. 사람 몇 명 죽었다고 육군 참모총장의 옷을 벗기고 언론이 집중적으로 군을 난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런 인식과 사고가 확장되면 ‘윤 일병이 무언가 맞을 짓을 했을 것’이라는 추론으로까지 이어진다. 윤 일병 사건이 한창 문제되자 군의 고위 장교들이 언론사에 전화해서 “윤 일병 가족은 이미 가정 내에 폭력 문제가 있다”라며 “왜 이런 문제는 취재하지 않는가”라고 거칠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런 인식은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군 인권 교육을 강화하던 8월, 육군의 한 병원장인 대령은 “소나기는 피해야 한다”, “사회 불순 세력이 군을 매도하고 있다”라며 노골적으로 반인권적 교육을 부대원에게 실시했다. 육군본부의 법무감은 “어떤 사람이 군 내부의 수사 자료를 시민 단체에 빼돌렸는지 색출하겠다”라며 군에는 어떠한 잘못도 없다는 걸 강변했다.

 

불순 세력이 존재한다는 그릇된 신념

 

이렇듯 집단의 권위를 수호한다는 명분에 휩싸인 나머지 이제껏 자신들이 당해온 비판의 화살을 슬그머니 군대 내 가혹 행위의 진실을 밝힌 사람에게 돌리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윤 일병 사건을 세상에 밝힌 군인권센터의 임태훈 소장이 그 당사자다. 임 소장에 대한 공격은 ‘일베’ 사이트를 비롯한 극우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음성적인 커뮤니티를 넘어 국가 공론의 장으로까지 이어졌다. 8월 20일, 국회 국방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공청회에 출석한 임 소장에게 한기호 새누리당 의원은 “병역 거부하려고 이 자리에 나왔느냐?”, “군대도 안 갔다 온 분이 무슨 인권센터 소장을 하면서 군을 논할 수 있느냐?”, “자격 없는 사람이 왜 군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냐.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마구 막말을 쏟아냈다. 임 소장이 동성애자로 군에 갈 수 없는 자원이고 그 대신 감옥에서 2년 동안 수감되어 처벌받은 사실을 집요하게 들추어내면서 “군 인권에 대해 말하지 마라”라는 일종의 압박이었다. 이후 한 종합편성채널(종편)에서 군 인권 문제로 시사 토론을 계획할 때 한 의원이 “임 소장이 패널로 나오면 출연하지 않겠다”라고 했고 방송사는 임 소장을 제외한 보수적인 논객 위주로 출연진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고 체계는 명확하다. 군대라는 정상인들의 사회에 무언가 비정상적인 개인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들을 감싸는 외부 불순 세력이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신념이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의 직관에 반하는 진실이 있다. 군에서 가혹 행위를 하고 개인을 따돌린 사람들은 전혀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못생겼거나 성격에 결함이 있는 개인을 차별하고 폭행하는 건 이들에게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다. 구타나 가혹 행위를 한 이유도 간단하다. 단지 “기분 나빠서”다. 이런 기분 나쁜 사람을 감싸고 돌면서 집단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에 이들은 격한 분노를 느낀다. 정상적인 자신들이 모욕을 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약한 개인을 처벌함으로써 공동체 정화 작용을 했다고 생각하고, 이를 통해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려는 ‘강자의 전능감’도 확보한다는 게 나이토 아사오의 진단이다. 여기서 전능감이란 자아의 불완전함이 공격적인 성향으로 전환되면서 그동안 결핍되었던 부분이 충족되는 일종의 황홀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하며, 어눌한 개인은 손쉽게 집단의 먹잇감이 된다. 그리고 먹잇감을 처벌하고 지배할 때는 전체가 가세한다. 이 중 누구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이런 도덕적 무감각은 집단을 욕되게 한 외부 인사에 대한 적개심으로 쉽게 변질된다.

 

이런 현상은 학교 폭력에서도 그대로 재연된다. 집단 폭행을 당한 학생에게 가해자와 그 부모가 찾아가면 부모끼리는 대개 화해를 한다. 그러나 가해자는 피해자를 노려보기만 한다는 보고가 많다. 왜 사과를 할 수 없는 것일까? 열등한 자에게, 그것도 자신이 지배하던 자에게 사과하는 굴욕을 참기 어렵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가해자가 보상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문제를 확대한 피해자에 대한 질책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학교 공동체 역시 결국 피해자를 추방하거나, “더는 학교를 더럽히지 마라”라며 피해를 감수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나이토 아사오는 경찰이 학교 폭력을 수사할 때, 시간이 흐를수록 교사들이 비협조적으로 변한다는 사례를 기술한다.

 

비정상인의 정상적인 삶을 허락하라

 

이런 가해-피해 관계에서는 정신착란이나 이상 성격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특수한 권력관계가 드러난다. 국가는 현대 민주사회의 규범에 맞게 헌법과 법률, 제도를 운영하지만 군대나 학교 같은 중간 집단은 시민사회의 규범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권력관계로 작동된다는 점이다. 나이토 아사오는 이를 ‘중간 집단 전체주의’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학교와 군대는 구성원이 자기 의사대로 탈퇴하거나 벗어날 수 있는 집단이 아니라 숙명적인 공동체다. 개인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 여기서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특수한 권력관계, 즉 서열이 발생하는 상황을 ‘군생질서(群生秩序)’라고 한다. 군생질서가 전체주의적 속성으로 치달으면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을 생산하게 된다.

 

이 같은 군생질서, 중간 집단 전체주의는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히 정부는 헌법의 취지대로 모든 국민을 평등하게 대한다고 하지만 언론과 사회단체, 정치권, 군대는 사회 서열과 차별을 합리화하며 이에 저항하는 자들을 공격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와 유가족에 대한 야만적인 공격, 장애인 복지시설이나 정신병원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집단 운동이나 주민투표, 취약한 탈북자들을 간첩으로 조작하거나 정치에 이용하는 정보기관, 성소수자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교회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찾아내서 무참하게 짓밟는 중간 집단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현대 문명은 차별과 배제를 체질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 가장 많이 오·남용되는 지식이 정신의학이다. 거지나 부랑자, 심신박약자는 언제든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추방의 논거로 인용된다.

 

13세기 서구 유럽에서는 나병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러자 그 많은 수용시설이 정신병자들로 채워져 심한 경우 파리 시민의 10퍼센트가 수감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이전에는 그리 위험하지 않았던 정신병자들이 갑자기 사회의 위험 요인으로 부각되어 수감되는 현상에서 시작된다. 푸코는 근대사회에 맞는 인간형을 창조하기 위한 처벌 기제로 정신병원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최근 군대에서 폭력이 확산되자 군 당국은 또다시 대규모의 정신의학자를 투입하고 있다. 소위 관심사병으로 불리는 심신박약자를 수용하기 위한 수용소의 출현이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 자체도 폭력적이다. 군대의 구조적 폭력은 집단이 소수를 처벌하면서 발생하는 일종의 왕따 놀이다. 따라서 관심사병을 포용하지 않고 배제하는 것은 폭력의 연장선일 뿐이다.

 

‘구토하는 사회’의 허약한 위장은 이물질을 계속 배제하는 구토 과정을 되풀이할 것이고, 여기서 쏟아져 나오는 비정상인들은 군대뿐 아니라 사회에 나와서도 이방인으로 살게 될 것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군대에서도 왕따가 되는 가련한 운명은 사회로 연장되어 정상인으로 살아갈 가능성 자체를 박탈당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우려하는 바다.

 

* 글쓴이는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입니다.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14년 10월 호에 실렸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4/10/24 [01:14]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