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었습니다. 그의 책을 손에 잡은 것은 내쳐 노느라 내평겨쳤던 입시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였습니다. 그의 문학적 향기보다는 그의 영어를 필요로 한 것이죠. <동물농장>은 여러 매체 심지어 당시 어린이들이 즐겨보던 만화잡지에까지 소개되었던 터라 줄거리는 대강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스탈린주의 비판을 반공주의로 오해한 당국이 진짜 사회주의자인 그의 책이 알려지는 것은 전혀 제지하지 않은 것은 지금 생각하면 코메디입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사전에만 기대서 그의 책을 독파해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동물들의 행태를 표현하는 온갖 의성어와 의태어는 나를 괴롭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제된 영어는 실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의 책을 한 쪽 한 쪽 넘기면서 영어의 묘미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습니다. 동물농장의 구성원들은 모두 지켜야할 7계명을 농장벽에 적어 놓습니다. 그 가운데는 '어떤 동물도 술을 먹어서는 안된다'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계명이 있습니다. 돼지들이 농장에 숨겨진 위스키를 나누어 마시고 취한 밤 앞의 계명에는 어느새 '지나치게'(to excess)란 말이 붙습니다. 나머지 계명도 이런 식으로 수정을 거치다가 돼지들에 의한 새로운 압제가 완성되어 갈 즈음 마침내 마지막 계명에는 '그러나(but)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하다'는 말이 붙습니다. 우리말 어순으로는 가운데 새 어절을 끼워넣어야 하기 때문에 벽에 씌여진 계명에 손을 대기가 쉽지 않은데 영어 표현으로는 맨 뒤에 'to나 but'과 같은 관계사를 붙이는 것으로 간단하게 의미가 뒤집어지는 걸 보고 무릎을 친 기억이 납니다.
영어공부 욕심으로 시작한 독서였지만 마지막 장을 넘길 즈음에는 서서히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반공교육의 세례를 받은 덕에 일차적으로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눈치챘지만 여기서 나아가 모든 전체주의,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압제를 비판하는 보편적 비판지성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압제에 저항하는 원리로서 '자유와 정의'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에 공감했습니다.
그의 사상적 전환기를 대표하는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1936년에 쓰여진 책입니다. 한 진보단체의 요청으로 대공황기이던 당시 영국 북부공업지대 실업자들의 실상을 취재해 집필한 것입니다.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당초의 요청에 충실한 르포르타주로서 실업자와 탄광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압권입니다. 더불어 "우리 모두가 지금 누리고 있는 비교적 고상한 생활은 실로 땅속에서 미천한 고역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얻은 것이다"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충분히 읽을만 합니다.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2부는 매우 논쟁적입니다. 2부는 스스로 밝혔듯이 상류 중산층의 하급에 속하는 그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자신을 낳고 길러주고 교육시킨 계급의 편견을 버리고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변신했는지를 밝히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하급 상류층으로서 선택한 버마의 식민경찰 생활을 정리하면서 번민 끝에 얻은 깨달음을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한 마디로 제시합니다. 아울러 소득수준과 관계없이 부르조아 계급에 속하고 그 속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울타리를 깨고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냄새에 대한 기억'을 매개로 설득력있게 제시합니다. 그 과정에서 반동적인 부르조아는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진보적이라하는 부르조아 출신 지식인들이 입과 머리로만 혁명을 할 뿐 자신들의 삶조차 변화시키지 못하는 속물근성에 대해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댑니다. 한 대목을 보면 나 자신부터 뜨끔합니다.
"중산층인 사람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공산당에까지 가입했다고 하자.(중략) 선거에서 노동당에, 아니면 가능한 경우 공산당에 표를 던진다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변화가 가능할까? 그가 여전히 습관적으로 자기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와 뜻을 같을 노동 계급 사람보다는 그를 위험한 '과격분자'라 여기는 같은 계급 사람과 있는 게 훨씬 더 편하다."
마치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입으로는 교육평등을 말하면서 '아이들이 원해서'라는 변명으로 자신들의 자녀는 외고 보내고 조기유학보내는 '강남좌파'를 말하는 듯합니다.
실재하는 그리고 뿌리깊은 계급의 차이를 - 억압이 아니다 - 마치 없는 것처럼, 또는 없앨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감상적 시도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합니다. 요크공 - 최근 개봉한 영화 <킹스 스피치>의 주인공 조지6세의 즉위전 이름 - 추진했던 계급통합 여름캠프가 얼마나 무의미할 뿐더러 위선적인지를 지적하고, 자신이 계급적 편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면서 심지어 프롤레타리아를 영웅시하는 감상주의자가 현실과 부딪치면서 오히려 반동화된 사례를 꺼집어 냅니다.
논지 전개상 부득이하게 자기 이야기로부터 출발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더 핵심적인 부분은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그는 1부에서 묘사한 비참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왜 영국에서는 사회주의가 호감을 가진 사람은 많으나 10년전에 비해 폭넓게 지지를 받지 못하는가,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파시즘에 기우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사회주의자들의 그릇된 행태에서 찾습니다. 마치 기독교의 경우처럼, 사회주의의 신봉자들이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지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회주의가 중산층 그리고 '배운' 사람들의 이론으로 비친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반합'이니, '수용자에 대한 수용'이니,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니, '프롤레타리아 연대'니 하면서 수학공식보다 어려운 전문용어를 남발하는 중산층 사회주의자에 대해 독설을 퍼붓습니다. 진짜 노동자들은 이런 말을 사용하지 않으며, 혹 노동자출신 중에서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국 노동자로 머물지 않고 노조간부나 정치인으로 변신한다는 점도 아울러 꼬집습니다.
80년 우리 운동권을 곧 바로 연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사구체논쟁을 비롯한 많은 난해한 논쟁과 학출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는 운동권 특유의 억양과 용어는 실천을 강화하기보다는 대중을 멀어지게 했을 뿐입니다. 그 때의 경험과 기억이 너무도 강렬했던 것일까요, 지금도 일부 진보진영 인사들의 글과 말에서는 그 분위기가 남아있습니다.
오웰이 비판하는 중산층 사회주의자들의 특별한 취향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요즈음 논란인 강남좌파를 떠올렸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말 자체가 영국의 온갖 과일 주스 애호가나 나체주의자, 샌들 애용자, 섹스광, 퀘이커 교도, 자연치유 사기꾼, 평화주의자, 여성주의자를 다 끌어들이는 자력을 지녔다는 인상을 받는다."
1930년대 영국이라는 맥락을 무시하고 오웰이 괴짜라 묘사한 용어규정에 얽매이거나 상처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진보라 하면서 피억압자의 삶과는 유리된 독특한 관심에 사로잡힌 중산층 진보들의 속물근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논지니까요. 이 부분은 미국 민주당에 빗대 오늘날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 공희준의 지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미국 국민들의 평균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라, 히피 편드는 정당, 동성애자 옹호하는 정당, 마약쟁이 두둔하는 정당, 그리고 낙태 찬성하는 정당, 문자 그대로 어떠한 주변적인 문화적 이슈들, 비유하자면 개인의 취향과 관련된 문제들만을 중시하는 정당이 돼버렸다는 데 있었습니다."(공희준 김용민 좌담 中)
클린턴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슬로건으로 이러한 민주당의 사슬을 끊으려 시도했던 것이구요.
수없이 쇄신과 개혁을 외쳤을 뿐 '민생'을 챙기지 못한 참여정부, 하다못해 말로라도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기 위해'라는 목표도 세우지 못하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 - 아마도 여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도시 중산층일 것이다 - 정치개혁을 창당의 대의로 내세운 열린우리당,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를 계승한다면서 우리사회의 핵심문제 가운데 하나인 호남차별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오히려 '난닝구'라는 조롱을 그치지 않는 국민참여당, 총선에서 뉴타운에 덩달아 춤추고 4대강은 반대한다면서 어차피 오지도 않을 영남표를 잃을까 두려워 신공항은 반대하지 못하는 등 토건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민주당, 이 모두 오웰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사회주의자들 내에 만연한 진보를 기계와 동일시하는 당시 풍조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합니다. '사회주의 - 기계 - 러시아 - 트랙터 - 위생 - 기계 - 진보'라는 등식에 사로잡혀 기계문명에 적대감을 품은 사람들을 사회주의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지요. 후에 <1984>를 쓰는 작가의 생각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엿보입니다.
누구보다 강하게 부르조아를 비판하면서도 오웰은, 다소 무의미하고 기계적인 부르조아 골탕먹이기는 문제라 주장합니다. 오히려 '빈곤은 누구에게나 빈곤'이라는 핵심적인 사실로부터 주위를 분산시킬 뿐이라는 겁니다. 그가 속물근성에 빠지지 않은 작가로 보는 D.H.로렌스가 <채털레이 부인의 사랑>에서 부르조아를 모든 원시적 생명력을 상실한 '고자'라 한 것에 대해 '나는 고자 아닌데, 어쩌란 말인가?'하면서 상당한 섭섭함을 토로합니다. 그는 이런식의 '프롤레타리아 상투어'가 위험하다고 하면서, 누굴 적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 사람의 병이 치유 불능이라는 말을 하면 된다는 말을 하면 된다고 적습니다.
이러한 모든 오류가 결국 민주적 사회주의 적이며, 사회주의 운동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 영국은 파시즘으로 흘러갈 것이라 경고합니다.
로렌스에 대한 그의 불평은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이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의 리그가 되어서는 안되고 압제자에 맞서 싸우는 피압제자의 리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피착취 중산층이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상 때문에 압제자의 편에 가담하지 않도록 그들을 포섬해야 한다고 주장힙니다. 그는 계급적 차이 - 영국식 맥락 - 를 버리라고 하기보다 연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해관계가 같은 협력은 언제나 가능하며 연합해야 할 사람들은 출신계급과 관계없이 '사장에 굽실거려야 하고 집세 낼 생각을 하면 몸서리쳐지는 모든 이들'이라 주장합니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오웰은 삶과 생각이 유리된 강남좌파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연대해야 할 가치는 '계급의식'도, '프롤레타리아 연대'도 아닌 '정의와 자유'라 선언합니다.
우리 진보가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특히 최근 진보개혁세력의 연대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논의를 생각할 때 꼭 우리를 위해 준비한 메시지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