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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불온한 뺄갱이’로 만드는 세상
[하재근 칼럼] 뉴라이트의 현대사 특강, 종교적 ‘체제광신도’ 만드는 전략
 
하재근   기사입력  2008/12/01 [18:27]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앞에 있는 60대 아저씨에게 내 모습이 흥미롭게 비춰졌나보다. 일행에게 ‘지하철에서 책을...’하는 식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릴 곳이 다 되어 책을 접었다. 책 겉표지가 노출됐다. 제목은 ‘한국 자본주의와 제3의 경제’였다.  

아주 순간적으로 겉표지가 노출됐기 때문에 이것을 다 읽을 시간은 없었다. 제목이 두 줄로 인쇄되어 언뜻 보면 ‘한국 자본주의’라는 단어만 크게 부각되는 구성이었다. 자본주의라는 단어만 봐도 빨갱이 냄새를 맡았나보다. 내가 내리는데 뒤통수에서 ‘저거 빨갱이 새낀가봐’라는 소리가 들린다.  

웃기는 건 책의 저자가 한국경제일보 편집국장, 산업경제신문 논설위원 출신이라는 거다. 빨갱이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경제계 인사다. 책의 내용도 친재벌적이다. 그런데도 단지 제목만 보고 빨갱이라고 찍어버렸다.  

한국사회의 수준이 이렇다. 자본주의라는 단어만 사용해도 불온함을 느낄 정도의 광신적 보수성이다.  

- 망국의 광신적 보수성 -  

이게 얼마나 심한 정신상태냐면 이렇다. 드라마 이산을 보면 정조가 어렸을 때, 정조의 신분을 몰랐던 동무가 정조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정조는 감격에 부르르 떤다. 왕정시대에 백성은 절대로 군주의 이름을 ‘객관화’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군주는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그러므로 정조는 평생 동안 백성들에게 자기 이름이 불리는 경험을 할 수 없었다.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존재는 이름에 갇힌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존재는 이름을 가질 수 없다. 왕은 그냥 절대적인 권력, 무한히 존중받아야 할 그 무엇이지 이름으로 한정될 수 없는 자다. 그래서 왕이나 황제는 그냥 전하, 폐하인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대역죄다.  

중국은 황제의 이름을 못 부르는 건 물론이려니와, 황제의 이름자도 못 쓰게 했다. 이런 것을 ‘휘’(諱)라고 한다. 그래서 이세민이 황제가 되자 ‘세’자를 못 쓰게 됐고, 대신에 ‘대’자를 썼다. 그 두 글자가 합쳐져 후대에 ‘세대’라는 말이 생겨났다. 
 
살아있는 권력은 물론이고, 하늘에 있는 절대권력은 더더욱이나 이름으로 객관화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에서 모세가 하나님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묻자, ‘나는 나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절대적 존재의 특징이다. 이름이 없거나, 설사 있더라도 불려선 안 되는 존재라는 것.  

한국에선 바로 자본주의질서가 절대적 가치로 굳어졌다. 어느 정도로 절대적이냐 하면, 자본주의라는 이름조차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다. 그래서 제목에 자본주의가 들어간 책을 보던 나는 졸지에 빨갱이로 찍힌 것이다. 
 
그저 경제일 뿐이지 자본주의가 웬말인가? 자본‘주의’라는 말은 다른 ‘주의’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절대성에서 상대성으로 떨어진다. 이것은 대역죄다. 빨갱이나 할 짓이다.  

거의 절대왕정이나 종교 수준의 광신이다. 한국 보수파들의 광신적인 체제사랑이 이런 정도인 것이다. 이런 광신적 정신상태에선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구질서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제기하면 무조건 빨갱이 역적이 된다. 그렇게 고착된 체제는 발전할 수 없다. 자본주의 100년만의 위기라는 현 상황에 우리가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냉전해체 국면에서도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건 이런 식의 절대적인 광신적 보수기조 때문이다.  

추호의 의문도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겠나? 장기적으로 서서히 고사해갈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시장공황을 맞아 자유로운 시장질서를 조정할 때다. 이렇게 변화가 필요할 때 광신적 체제사랑은 치명적이다. 
 
- 종교적 ‘체제광신도’ 양산하려는 교육전략 -  

교육에 대한 한국 기득권 세력의 집착은 대단하다. 이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된다. 하나는 제도, 또 하나는 내용이다. 첫째, 제도는 귀족학교 쟁취를 위한 노력을 말한다. 국제중으로 이 노력이 중학 부문에까지 갔다. 결국 초등학교에도 유사한 제도적 공세가 시작될 것이다. 둘째, 내용은 글자 그대로 교육내용을 말한다.  

교육내용을 통제하기 위해 교과서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한다. 한국 구체제에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는, 지하철에서 ‘자본주의’가 박힌 책만 보고도 ‘저거 빨갱이구만’이라고 낙인찍는 보수적 국민을 양산하려는 전략이다. 
 
요즘엔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현대사 특강’이라는 것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도 내용을 통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교육내용을 통제한다는 건 국민의 머리속을 통제하는 것과 같다. 21세기 공화국에서 구질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봉건적 국민을 만들려면 교육통제가 아주 중요해진다. 
 
이럴 경우 이미 지적한 것처럼 한국 사회의 변화와 개혁이 힘들어진다. 광신적 보수성이 사사건건 변화의 발목을 잡고, 소모적인 국론대립이 이어져 아무 일도 못하게 될 것이다. 대신에 구체제에 기반한 기득권은 반석 위에 오르게 된다. 구체제에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는 국민들의 보호 속에 천년만년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득권 세력이 교육내용 통제에 열을 올리는 것은 국가의 미래와 기득권의 보존을 맞바꾸는 행위다. 그들의 세상이 유지되기 위해 우리 국민은 사회과학서적만 보고도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바보’로 퇴화된다. 한국사회는 후진성에서 탈피할 수 없게 된다. 이대로라면 10년 후, 20년 후에도 지하철에서 누군가 빨갱이 딱지놀이를 하게 될 판이다. 국가의 미래가 음울하다.
* 필자는 문화평론가이며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을 역임했습니다. 블로그는 http://ooljiana.tistory.com, 저서에 [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 - 자유화 파탄, 대학 평준화로 뒤집기]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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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2/01 [18:2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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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쎄요 2008/12/03 [18:58] 수정 | 삭제
  • 망국의 '반공성'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 보스코프스키 2008/12/03 [13:59] 수정 | 삭제
  • 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우리사회 말고도 있기에... 예를 들어 문화대혁명 당시의 중국에서는 자본주의가 언급된 도서를 소지할 수 없었는데 정반대의 체제를 지닌 이 땅도 역시 이러한 것 까지는 아닐지라도 자연적으로 불온인사라는 생각을 들게하는 방향으로 몰아간다는 생각입니다. - 차이는 강제와 자연을 가장한 선전전 정도의 차이만 ... 참 불상(不祥 - 상서롭지 못한; 이것의 변형이 불쌍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한 세상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