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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밖 소나무와 재각, 그 가을의 전설
[포토에세이] 그 전설이 남겨준 빛바랜 사진 몇장 들고서...
 
최방식   기사입력  2008/10/18 [13:57]
가을의 전설입니다. 이제 막 철이 든 사내는 그 가을을 떠올렸습니다. 숲 속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갑니다. 철지난 오두막은 굳게 잠겼습니다. 성큼 자란 대나무 숲은 의구합니다. 아랫목 온기는 사라진지 오랩니다. 어둡고 깊은 골을 막 벗어나 하얀 전설을 마주합니다.

사내가 고향을 찾았습니다. 늘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땅입니다. 가슴 속 깊이 꼬깃꼬깃 묻어둔 빛바랜 세월입니다. 막 꺼내드는데 왠지 모를 서러움부터 복받칩니다.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합니다. 동네 어귀 황금빛 들판에는 나락이 익어갑니다. 추산봉을 넘느라 지친 갈바람은 막 쉬어가려고 사내 곁으로 다가섭니다.

▲ 어둠의 골을 지나 하얀 전설을 찾았습니다.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세월입니다. 동네 어귀 소나무 일곱그루. 그리고 재각을 돌아 찾아든 내 고향. 대나무 숲은 그대로건만...     © 최방식

▲ '가을의 전설'이 펼쳐진 황금빛 들녘입니다. 저 큰 하늘 영상에 투영됐던 그 영화가 끝나고, 사내는 사진 몇 장 챙기고 돌아섰습니다. 다시 올 날을 기다리면서요.     © 최방식 기자
사내가 그 산골을 떠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일 겁니다. 큰 누나가 읍내에서 미용실을 하는 데 꼬마둥이를 전학시켰습니다. 고작 10리 길이지만 꼬마는 고향을 떠나는 게 무서웠습니다. 엄마 품을 벗어나는 게 왜 그리 두렵고 슬펐는지 모릅니다. 푸른 하늘 누런 들녘, 그리고 새털구름 모두 그대로이건만.
 
늘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땅
 
전학 앞두고 꼬마는 말을 잃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가서 공부 잘하라고 격려해주실 때도 한마디 대꾸조차 못했습니다. 같은 반 계집아이가 예쁘게 장식한 꽃 편지를 건네 왔을 때도 꼬마는 그저 고개 숙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해 가을 꼬마는 고향을 떠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꼬마가 마을에 돌아온 건 중학교에 입학하고 입니다. 채 1년도 안 돼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마을 친구들과 중학교를 달리하게 된 겁니다. 모두가 그 마을 학군으로 지정된 중학에 다니는데, 꼬마만 읍내 중학교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게 됐습니다. 그렇게 3년은 전설 속에 안겨 살았습니다.

▲ 언제나 사내의 가슴 속에 펼쳐진 들녘입니다. 사내는 늘 저 구름 위 뿔봉을 그리워했습니다. 하얀눈이 밤새 쌓이던 날 사내는 털신을 신고 저 산을 올랐습니다.     © 최방식 기자

▲ 탐스런 고향입니다. 그해 가을 같은 반 계집아이의 예쁜 편지를 받아 들고서도 사내는 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전설을 떠나는 두려움에...     © 최방식 기자
꼬마는 이 마을에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를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고, 누나가 몰래 마련해준 등록금을 받아 도회지 학교에 가게 된 겁니다. 방학 때나 와 있을 뿐 사실상 이 마을에 살지 않게 됐습니다. 하지만 꼬마는 그 고향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시간이 생기면 전설을 찾곤 했습니다. 명절 때면 길이 막혀도 선물을 사들고 들어왔습니다. 귀소본능이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그 하늘과 들녘, 그리고 높디높은 저 봉우리 넘어 살랑살랑 불어오는 마파람이 그립고 또 그리웠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잊혀지기 시작했습니다.
 
“꼬마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흐레 전 쯤 도회지에 나와 사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유골을 들고 고향마을을 찾았습니다. 사립문 넘어 아련한 곳, 산 귀퉁이에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지친 몸을 끌고 사내는 도회지로 왔습니다. 그날, 기일이 다가오면 한 해 한 번 아버지를 뵈러 왔습니다.

▲ 쪽빛 하늘은 전설의 영화를 상영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갈바람에 살랑이며 어서 오라고 속삭입니다.     ©최방식 기자

▲ 가을의 전설은 사내에겐 언제나 그리움입니다. 언젠가 걸었던, 언젠가 한번 봤던, 그 길 그 연인이 있으니까요.     © 최방식 기자
그것도 몇 년 전부턴 잘 지키지 않습니다. 그저 여름휴가 때 한 번 오면 성묘랍시고 지나쳤습니다. 올해는 여름휴가도 기일 성묘도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가을이 완연한 어느 날 뒤늦게 아버지 묘소에 들렀습니다. 그리곤 묏등에 앉아 사내는 어린 시절 전설을 떠올렸습니다.

트리스텐이었던가요? 전쟁이 지긋지긋해 질 즈음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시골 한 마을로 사내가 찾아든 게. 그 평화롭고 고즈넉한, 가을 산야가 울긋불긋한 곳에 찾아든 예쁜 여인 한명. 엄마를 떠나보낸 삼형제는 앞 다퉈 이 여인을 흠모하지만 여인의 마음은 가을에 태어난 전설의 사내뿐입니다.

전쟁터에서 동생을 지키지 못하고 떠나보낸 트리스텐. 형이 좋아하는 줄 알면서도 그 여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만 사내. 아픔을 뒤로하고 고향을 떠나지만 사내의 마음속엔 언제나 그 고향, 그 전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트리스텐. 남은 두 형제사이에서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여인. 사내는 그 가을에 곰과 사투를 벌이다 죽어갑니다. 전설 속으로 그 품에 안겨 편히 잠듭니다.
 
▲ 고창 모양성입니다. 사내의 전설 속에 늘 자리하는 철옹성이지요. 성도 가을 색에 취해 고색창연합니다.     © 최방식 기자

▲ 등성이 넘어엔 사내의 전설이 있습니다. 성곽 너머 어둡고 깊은 골을 지나면 시작되는 하얀 전설입니다.     © 최방식 기자

묏등에 앉아 떠올린 하얀전설
 
사내가 황금 들녘 한 가운데 카메라를 들고 섰을 때 그 영화는 막 끝났습니다. 하늘 위 넓디넓게 투영됐던 은막을 걷으며 갈바람이 한 줄기 사내의 목덜미를 간질입니다. 사내는 오래 도록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동구밖 소나무. 어귀의 재각. 흔들리는 대나무 숲. 그리고 벌판 너머 아른 거리는 뿔봉. 그토록 아련하던 전설의 세상.

뒤 늦게 아버지의 땅에 들른 사내에게 그 하늘 그 들녘은 멋진 영화 한 편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동네 어귀 어딘 가에서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그 전설이 사내에게 남겨준 사진 몇 장 들고서요.
*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인터넷저널> (www.injournal.net) 편집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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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0/18 [13:5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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