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대중음악지형도] 命人 - "우리가 있는 풍경"
 
기타기순   기사입력  2002/03/05 [14:58]

자코(Jaco Pastorius)의 머리와 펫 메스니(Pat metheny)의 가슴을 지녔던 조동익과 이병우는 적어도 그때까지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음악가들이었다. <어떤날>은 B612의 어린 왕자가 연주하는 음악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배달부 같았고, 도착한 음악소품들은 아스라한 유년의 기억을 생각나게 하는 맑고 순수한 서정의 세계로 우리를 잡아끌었다.  

음악의 본질적 구성요소가 ‘음’그 자체가 아니라 개별 음들의 상호관계를 조직한 선율조각들이라면, 상대적으로 세련되고 달콤한 두 번째 『어떤날Ⅱ』보다 바로 이 『1960·1965』앨범은 그런 단일 음들간의 거리감에 보다 집중하고 있으며 그 어떤 음악 형식에 대한 배려도 없어 보였다. 여섯 줄 기타와 네 줄기타를 각각 손에 든 둘은 자신들의 담백한 목소리와 소담스런 선율에 실린 진실 된 글만으로도 저 멀리 별나라 왕자의 감성을 그대로 가져다 놓는 부러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보석처럼 영롱한 테마 선율을 모티브로 씌어진 [하늘] 같은 곡이나 들국화의 공허한 울림과 달리 한층 차갑고 우울한 공간감을 함축한 [오후만 있던 일요일], 담백한 프렛리스 베이스의 온기가 차분하게 배석한 [비오는 날이면] 등 앨범의 전 트랙을 감싸는 기운은 하나같이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사심 없는 호기심이 때로는 날카로운 통찰에 이르는 아이들의 동그란 눈초리를 닮아있었다.

언제나 수줍게 클래식에 닿아 있던 이병우의 코드워크는 투명한 아름다움을 전해주었다. 밤 하늘 별나라의 정서를 옮겨온 그 해맑음은 항상 음들이 지나간 여백을 사고하는 절제와, 음 자체보다 그들간의 거리관계에 대한 조율에 몰두하던 이병우의 기타리스트로써의 정체성이었고, 이것들은 앨범 전반을 관통하는 사운드의 지형도를 잘 꾸며 놓고 있었다.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풍경들을 한 줌의 과장이나 미화적 너스레도 거부한 체 조용히 내성적으로 그려나간 이 앨범은 하나의 독창적 음악스타일로서 ‘자폐적 서정미’까지 나아갔으며 , ‘어떤날 류’ 라는 독자적인 음악 흐름까지 이어갈 수 있는 텍스트였지만, 어린왕자의 배달부로 역시 고용되었어야 할 손진태나 박학기 같은 재능 있는 몇몇은 너무도 빨리 늙어갔다. 어려서 천재 소릴 들었던 김현철은 지루한 동어반복만을 일삼다 난데없는 표절범으로 몰리더니 급기야 노총각 해프닝으로 연명하는 엔터테이너로 전락했고, 하덕규는 개신교 집사로 복귀했다.  

조동익이 스튜디오의 수장 노릇을 시작하고 이병우가 빈 국립음대로 유학을 떠난 이래로 우리는 한번도, 항상 따뜻한 시선이 가닿은 일상과 그 감성을 아우르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선율과 화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

http://jabo.co.kr/zboard/

15년이 흘렀고, 命人의 『우리가 있는 풍경』 앨범은 당분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던 별나라 왕자의 정서를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우리 앞에 배달해 놓고 있다.

만만치 않은 사회의식으로 덧 씌워진 그녀의 감성과 음악적 자아의 속살에는 <어떤날>의 ‘자폐적 미학’을 오랫동안 경험한 흔적이 상처처럼 남아있으며, 삶에 대한 소박한 희망과 넉넉한 시선이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다.

命人이 품고 있는 미처 아물지 않은 그 상처들이 『우리가 있는 풍경』앨범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수놓고 있다면, 조각조각 삶의 풍경에 대한 그녀의 관조는 [고장난 신호등]에서 얼핏 노출된 가쁜 호흡의 발성과 안타까울 정도로 열악한 스튜디오의 하드웨어적 한계 마저 풍요롭게 보듬어 준다.

전체적으로 <어떤날>의 『1960·1965』앨범이 가진 심미적인 영향의 재래로 분석될 수 있는 『우리가 있는 풍경』앨범은 짧은 호흡의 졸렬한 비트와 집단 난교를 연상케 하는 구역질나는 래핑으로 뒤범벅 된 주류 음악의 방법론으로부터 무척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새롭게 작곡된 11곡의 오리지널 넘버들은 섬세한 개별 음들간의 거리감을 지니고 있으며 제각기 성의 있게 다듬어져 있다. 요소요소 깊은 여백의 울림을 점점이 박아 놓고 있는 어쿠스틱 피아노와 착실하게 수집된 재즈 화성들은 命人의 아름다운 글들에 한층 진정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순수하고 투명한 질감들이다.

命人의 블루지한 보컬 톤을 지원하는 매우 느린 템포로 합의된 [www.386.com]은 <자우림>같은 아메리칸 성향의 밴드가 급조한 카피곡들과 궤를 달리 하는 트랙이다. 무성의한 미들템포나 성급한 질주감에 몰입하는 모던 록의 패턴을 냉정하게 재고한 이 넘버는 느린 템포의 통통거리는 액센트를 적절하게 배치했다.  [마스터베이션]에서 야심차게 기획된 펑키한 바운스들도 긴 호흡을 차분하게 이어가며, 박진감 있는 베이스의 슬래핑을 센스 있게 차용해 놓았다(더불어 이 앨범에 참여한 세션맨들은 변방의 뮤지션들이지만 국내 대중음악계의 저변이 생각보다 넓다는 생각이 들만큼 훌륭한 연주력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간간이 들리는 기타리스트의 블루스 연주와 찰랑거리는 리듬기타는 황급히 기용한 A급 세션맨들의 타성에 젖은 연주를 능가하고 있다).  

정작 앨범의 중요한 정체성은 [Re:서른 즈음에] 나 [너무 힘들면], 혹은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등에 나타나는 命人의 촉촉한 보컬 톤에 실린 낯선 듯 익숙한 선율일 것이다. 곡 당 기천만 원의 현금을 챙기는 제도권의 기름진 인기 작곡가들 보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이들에 의해 씌어진 『우리가 있는 풍경』앨범의 멜로디들은, 내성적이고 무구했던 <어떤날>의 조동익과 이병우의 동심 끝자락에 놓인 감성을 선물 받은 듯, 달콤하면서도 경박하지 않은 음들의 거리관계가 정확히 제도된 결과물이다. 그것들은 순진한 아이들의 동그랗게 놀란 시선들이 때아닌 핵심을 포착하듯 새로울 것 없는 코드진행에 자연스럽게 음들 몇몇을 그저 던져 놓았지만, <노찾사>나 일련의 민중가요 같은 경건한 가곡 풍이나 기만적으로 조립된 슈거 멜로디가 아니라 하나의 독특한 음악적 흐름을 지어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엔 앨범의 진정한 아티스트인 命人의 치열한 사회의식에 내재된 단아한 감성과 작곡가들이 빌어온 어린왕자의 정서가 교감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15년 전 단절된 줄 알았던 <어떤날>의 자폐적 서정미가 사회적 긴장감과 예술적으로 교감하는 걸 목격할 수 있다.

命人의 『우리가 있는 풍경』앨범에 그녀의 이력을 떠올리며 <노찾사>만을 말하거나 빛 바랜 빨간색을 연상하는 건 그래서 모욕적이다. <어떤날>을 기억하는 새로운 배달부가 어린왕자의 투명한 시선으로 삶과 사회를 조용히 바라보며 촉촉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인터뷰] "30대의 가수가 자기 세대에게 들려주는 연가" -가수 命人을 만나다-

* 본 기사는 대자보 57호(2001.4.28)에 발표되었던 기사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2/03/05 [14:58]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