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세대 6인은 왜 졌나? 근래 가장 언론의 주목을 받는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은 지난해 “북핵사태가 해결되면 대선은 전후세대들의 경쟁으로 간다”고 예측했다. 필자 역시 한국전쟁 이후에 출생한 대선 후보 여섯명을 주목하고 있었다. 강금실,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천정배, 추미애가 그들이다. 그러나 대선은 그들끼리의 경쟁이 아닌 그들이 빠진 경쟁으로 채워지고 있다. 집단주의와 연공서열에 함몰된 제도권의 386이 지리멸렬에 빠진 동안에 정치권의 차세대 주자로 떠오른 강금실,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천정배, 추미애는 왜 패배하였는가? 1. 유시민 - 민청세대 이해찬에게 착취당하다 이해찬이라는 사나이는 걸물이다. 그는 대통령도 아니고 국민가수도 아니면서 제 이름이 붙은 세대를 만들어냈다. 이해찬과 딱 30년 0개월 0일 차이가 나는 필자도 그와 연이 있다. 필자는 한해 차로 ‘이해찬세대’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이해찬 덕분에 대학에 입학했다. ‘한가지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슬로건 덕분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적에는 이해찬세대의 대학입학을 미리 준비한다는 취지 때문인지 특기자 입학정원이 적이 늘어나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이해찬에게 은혜(?)를 입은 얼마 안 되는 학생들의 일원일 뿐이다. 정작 이해찬세대의 맏이인 1년 후배들은 높은 특기자 경쟁률만을 체감했다. 이렇듯 이해찬세대가 겪은 교육적 고충이야 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우석훈이 <88만원세대>에서 지적했듯 이해찬 나이께의 세대들은 직장에서 88만원세대 위에 군림하고 있다. 허나 직장 걱정조차 해결하지 못한 88만원세대는 적어도 현실정치 공간에서는 이해찬과 맞부딪힐 공간은 적다. 그리고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과 386세대의 ‘쿵짝’이 보여주듯, 15살~25살 터울, 즉 숙부-조카뻘 관계는 정치적인 동맹으로 발전할 가능성이라도 있다. 반면 현실 정치인 유시민에게 같은 대학의 학생운동 선배인 이해찬은 넘기에 높은 산이었다. 유인태, 이철과 같은 민청학련 세대는 1990년을 전후로 의회에 자기 성원을 파견시켰고, 야당에서 잔뼈가 굵어진 그들은 마침내 김대중-노무현 시대를 맞아 국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자연히 이 세대는 조직력에서도 우위를 선점하게 되었다. 이 환경을 우회적으로 돌파하는 건 곧 노무현의 그늘과 이해찬의 자장을 벗어난다는 의미다. 방도가 없진 않았다. 필자는 그 대승부수의 지점으로 ‘한미FTA'를 든다. 협상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애초 기획안 ’약값적정화방안‘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을 눈앞에 두었던 유시민이다. 그가 만일 그때 “비록 노무현 대통령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싶지만 한미FTA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선언하였다면? 범여권 내부에서 유의미한 독자적인 세를 구축하면서 민주노동당에 기웃거리는 실망층을 붙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허황된 잡설을 늘어놓고 있는 걸까? 그렇다. 유시민에게 그 길은 없는 길이었다. 유시민의 패인은 그의 잘못된 원칙과 노선이라는 허무한 결론이 내려진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그의 개혁적·진보적 태도가 손상된 것이 그를 둘러싼 ‘세대적 결집’에도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 세대는 유신과 긴급조치 속에 성인이 되어 곧바로 5.18을 관통한 세대다. 유시민이 중도 탈락하기 직전 한국일보의 고종석 객원논설위원은 칼럼으로 그를 일격했다. 고씨는 2002년 이후부터 유시민을 줄기차게 비판해왔고 드디어 직격탄을 날리고야 말았다. ‘고비유락’이라 할 만하다. 더 야릇한 사실은, 고종석이 2002년 이전에 내내 유시민에 대한 호감을 표시해왔다는 것이다. 참고로, 2001년도 <한겨레21>에서 자유주의를 두고 대담(또는 정담)을 나누기도 했던 둘의 나이는 한살 차(고종석은 1958년에, 유시민은 그 이듬해 태어났다)이다. 2. 강금실 - “그녀는 왜?”가 아니라 “그녀는 누구인가?” 1957년생으로 고종석과 친구로 지내며, 한편으로 유시민에게는 ‘누나’로 불리우는 강금실은 필자가 대선 정국과 관련해 가장 주목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민변을 위시하여 시민사회의 지원을 받을 만한 이력과 성향을 가진 정치인이다. 참여정부에서 장관을 지냈지만 노무현의 후계자라는 오명을 피할 만한 이점을 보유했다. 참여정부가 온갖 난관에 부딪히던 2003년도에도 ‘인기 장관’으로 각광을 받았다. 서울시장 선거 전후로는 한미FTA졸속추진이나 평택 대추리 사건 등에 불만을 표하기도 하는 등 노무현으로부터의 차별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2005년도 가을에는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의 변론을 맡아 눈길을 끌었다. 또 그는 여성 정치인으로, 역으로 남성주의 사회의 허점을 이용하는 이미지와 재주도 지녔다. 가령, 노회찬과 심상정은 인터뷰에서 유시민을 맹비난하지만 강금실에게는 호감을 표한다. 그에게는 박근혜, 한명숙, 심상정, 추미애 등 다른 여성 주자들이 감당해야 할 공세와 오해를 낙후시키는 마력이 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출마하지 않았다. 그는 시민사회 일각이 미래구상을 출범시킬 때도 미동을 하지 않았고, 범여권의 대통합 작업에도 나서지 않았다. 조용히 열린우리당 당적을 유지하다가 자연스레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옮겼다. 경선이 진행 중인 지금은 모바일투표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어느 후보도 지지하지 않고, 인물평도 마다한다. 강금실이 어떤 정치인인지 알 도리가 없다. 엄청난 잠재력을 접어놓고 기다리는 것인지, 앞으로 영영 어떤 야심도 품지 않을 것인지, 그도 아니면 깜냥이 안 되어 좌초했는지 알 수 없다. 깜냥이 안 된다면, 그것을 스스로 아는지 모르는지도 알 수 없다. 대통령과 동석한 채 장관 임명을 수긍하지 않던 검사를 맞이하고, 갈등하던 송광수 검찰총장의 팔짱을 끼던 모습 이외에 강금실의 권력투쟁 패턴을 파악할 수 있는 힌트도 없었다.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을 적 나타난 소수자를 향한 애정, 딱히 창조적이지 않았던 정책, 72시간 마라톤유세에서의 투지도 별다른 단서가 되지 못한다.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기에 그녀 자신에 내재된 패인을 가늠하기도 힘들다. 그리하여 강금실은 ‘왜 졌나?’라는 질문 따위는 사양할 입장이 됐다. 그럼 도대체 정치인 강금실은 누구인가? 그는 질문의 기회를 주고 답변의 기회도 얻으려 할 것인가? 3. 천정배, 추미애 - 대통합에 홀려 스스로 꺾은 독자세력화 천정배와 추미애는 여론조사 컷 오프로 인해 대통합민주신당 경선 후보 5인에 드는 데 실패했다. 5인 중 두명의 친노 후보가 중도사퇴함으로써 그들의 조기 탈락이 아깝다는 견해가 많았지만 자업자득일 뿐이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서나 명분을 위해서나 대통합을 반대하고 독자세력화를 꾀했어야 했다. 올해 들어 천정배는 ‘한미FTA반대’의 승부수를 던졌다. 혹자는 “정가에서는 대선을 포기한 것이라고 평가한다”는 분위기를 전했지만, 친노직계와 김한길계 통합파, 민주당 등이 백가쟁명하던 시점에 독자적인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은 확실하다. 더구나 최재천, 이계안 등과 10석에 육박하는 민생정치모임도 꾸렸다. 어차피 대세론으로 대통령될 것이 아니라면 과감한 도전밖에 달리 길은 없고, 천정배는 그 첫발을 떼게 되었던 셈이다. 독자세력화에 의한 분열이 한나라당에 반사이득을 안겨다준다는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후보단일화라는 방책이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균열로 범여권의 스펙트럼을 넓힌 다음 연합하는 것이나 한꺼번에 통합한 다음 후보를 선출하는 것 사이에는 대선전략상의 차별점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친노직계와 민주당을 다 아우르는 대통합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다만, 결선투표 절차도 없고 200개 넘은 지역구에서 일일이 연합공천이나 후보단일화를 꾀하기도 벅찬 내년 총선이 통합을 강제했을 뿐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의 창당은 이렇다 할 바람이 불지 않는 환경에서 소리 없이 조직력을 키워온 쪽, 특히 정동영측에 유리한 사전작업이었다. 이념노선의 차별화를 잊고 신당으로 복귀한 천정배는 그 순간부터 패자가 된 것이다. 그는 필자가 이 지면에서 지난 번에 지적했듯 “그렇고 그런 중진”에 자신을 가두고 말았다.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흔들기는 물론 후보단일화도 반대했던 추미애는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음으로써 정계 입문 이래 최대의 굴곡을 겪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이 개혁의 기대를 배신하고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그에게도 숨통이 트였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가 민주당을 박차고, 이를테면 정범구만큼이라도 시민사회와 손잡고 독자세력화에 나섰더라면 그는 지금도 대선의 다크호스일 것이다. 그렇지만 ‘김대중 독트린’의 열성적인 계승자이며 호남을 떠나서 민주세력이 살 수 없다고 믿는 그는 대통합의 회오리로 몸을 던졌다. 추미애나 천정배나, 이들은 소위 중도통합민주개혁평화미래창조세력(하하···.)의 ‘반한나라 단결증후군’을 떨칠 수 없는 정치인들이다. 필자는 그저 정치공학적 소극성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기성 거인과 지역적 기반을 박차는 창조적 파괴는, 오로지 대안적 이념에서 나온다. 과감함이라는 퍼스낼러티조차도 -그 과감함이 단순히 외향성이 아니라면- 그렇다. 그들은 고민이 부족하다. 4. 졌지만 이긴 심상정 그리고 노회찬 - 노무현과의 이중게임에서 지다 민주노동당 대선 주자 중 인지도가 가장 낮고 당내 경선에서도 3위를 기록하리라 예측되었던 심상정이, 어째서 필자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대파란의 한 경로를 상정했을 따름이다. 어림없는 일이긴 했지만. 심상정은 경선 기간에 2002년의 노풍을 예로 들며 ‘심바람’이 가능하다고 외쳤지만, 현재의 심상정은 20년 전의 노무현에게도 유명세에서 못 미친다. 당내 경선에서도, 조직세가 약한 노회찬을 제치고 2위에 오르는 것이라면 몰라도 당선자가 될 확률은 처음부터 지극히 미미했다. 그래서 ‘졌지만 이긴’ 심상정을 두고 ‘패인’을 계속 들먹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를 ‘전후세대 6인’의 일원으로 지목한 필자의 상상력이 문제라면 문제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노회찬이다. 그는 3등을 할 수도 있지만 1등으로 뛰어오를 수도 있는 후보였고, 범여권 중진들이 그의 본선 출마를 우려할 만치 다크호스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국민적 관심은커녕 그가 호언한 ‘평당원 혁명’조차 물거품이 됐다. 그의 선거캠프에 직접 참여했던 필자로서 선거전략을 되돌아보며 몇가지 문제점을 꼽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노회찬의 좌절을 둘러싼 배경만을 언급하겠다. 노회찬은 노무현과 이중의 게임을 벌이고 있는 관계다. 두 사람은 제로섬 게임을 벌이는 한편으로 얼마간의 동반성장관계에 있다. 2000년 창당 당시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은 20퍼센트였다. 그런데 노무현열풍이 불어 민주노동당은 과거 백기완 선본이나 민중당의 득표율로 내려앉을지를 걱정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에는 대중정치인이 아니었지만 여기서부터 가장 불리한 승부를 맞이한 쪽은 노회찬이다. 그는 합법진보정당 건설의 선두주자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공식석상에서 자처하면서도, 자신의 노선을 쓸데없이 과격하게 포장하지 않고 설득력 있게 좌파의 정책·강령을 선전할 역량이 뛰어나다. 요컨대 그는 민주노동당과 노무현-범여권의 사이에 위치한 유권자들에게 가장 어필하는 정치인이다. 노회찬은 권영길, 심상정과는 달리 민주노총과 같은 조직기반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당 밖에서 관망하는 진보적 시민들과 지식인 그리고 비정규직 등 비조직 민중들의 지원이 절실했다. 허나 민주노동당은 그 유권자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지는 않았고 노회찬은, 거슬러 올라가면 원내 진출 이전부터, 노무현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셈이 되었다. 노무현 정권에의 ‘실망’이 널리 퍼진 후에도 노회찬의 포텐셜은 넉넉하지 못했다. 아니, 도리어 노회찬에게는 해가 되었다. 우스개소리로 한자는 다르지만 음이 같은 두 사람의 성을 운운하는 사람이 많다. 둘은 언변이 뛰어나 토론을 즐기고 거대한 권력과의 싸움(노무현 대 조선일보, 노회찬 대 삼성)을 정치의 제일의 업으로 삼는 등의 공통점을 지니기도 했다. 아니나다를까 두사람을 잇는 연상공학은 실제로 양으로 음으로 진행되었다. 부정적으로 말이다. 필자는 그 내용을 “노회찬은 ‘노무현 좌파 버전’이고, 노무현은 ‘노회찬의 미래’다”라고 간추린다(자세히 보면 둘의 성격과 기질은 엇갈린다. <딴지일보>의 김어준은 노회찬을 ‘청교도적’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인기 없는 능변가 대통령은 20년전의 그를 방불케 하는 노회찬의 ‘최대 아킬레스건’이었다. 어쩌면,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여러가지 과오도 있지만 결국 그래도 큰 일을 했다”며 대통령의 인기가 올라가는 정세가 노회찬에게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노무현의 보수화를 비판하면서도, 달리 말해 민주노동당에게 조금씩 기울고 있으면서도, 그의 탈권위주의만큼은 내심 좋아하는 이들은 노회찬에게는 마지막 남은 외부 우군이었다. 지리멸렬한 대선 정국에서 ‘노회찬이라면?’이라며 들뜰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난 5년에 질리고 지친 그들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노회찬은 ‘삼성엑스파일’ 폭로로 지난 4월 기소되면서 최대의 승부처를 마련했지만, 한나라당 경선과 범여권 통합을 비추기 여념없는 다수 언론은 이내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거꾸로 말해서, 언론이 조명하지 않고 못 배길 만한 상황을 연출하는 데 노회찬은 실패한 것이다. 올 대선 재미있을까? 2012년은? 필패 후보라고 생각했던 이명박이나 정동영(이자는 얄궂게도 휴전협정 체결일에 태어났다)이 대통령될까? 아니면 이명박의 유고를 거쳐 재기한 박근혜의 막판 승부? ‘비호감’ 이해찬? ‘제2의 이인제’ 손학규? 글쎄다. 이인제, 이수성이나 심대평의 승리는 내각제 개헌을 거쳐 노무현이 총리가 되는 것보다도 가능성이 낮다. 혹시 이러다 권영길이 되는 건 아닌가? 문국현이 있기는 하다. 정치권 바깥에서 축적된 그의 이력은 탈이념적 유권자들에게도 호감을 자아내고, 정책노선은 진보를 자부하지만 민주노동당을 거부하는 유권자들에게 어울린다. 문국현 스펙트럼의 최대치는 노무현과 정몽준이 단일화했을 때의 결과와 같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자리수의 현 지지율을 극복하고 범여권을 평정할 정치적 역량이 보이지 않는다. 문약한 샌님이라서는 아닌 듯하다. 그가 대통합신당에서 떨어질 오륙십개의 감 홍시를 입 벌리고 기다린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그 자리는 시민사회라기보다 정몽준, 고건, 정운찬 등이 거쳐간 ‘버뮤다 삼각지대’에 가깝다. 미증유의 재미없는 게임을 남기고 떠난 6인의 전후세대 대선주자는 아마 2012년 대선 정국에도 등장할 것 같다. 필자는 거기에 한나라당의 오세훈, 원희룡, 범여권의 김두관, 386세대 출신 누구누구, 민주노동당의 조승수 정도가 추가되리라는 예감을 갖고 있다. 걸러지고 또 추려지더라도 다음 대선은 한국전쟁 후부터 1960년대 초중반에 출생한 이들의 박터지는 대결이 될 것 같다. 자신의 이념노선을 밀고 나갈 뚝심과 세대적 조건을 활용할 깜냥을 충전한 자들이 펼치는 최선의 경쟁을 기다린다. 무엇보다도, 그 이전의 5년이 한국 정치 초유의 창조적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 이왕이면 마지막 승자는 진보정당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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