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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와 휴머니즘, 혁명의 쇠락
[벼리의 영화보기] 너무 무딘 자의식으로 너무 벅찬 역사 껴안으려 했나
 
벼리   기사입력  2007/08/12 [03:37]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100억 짜리 스펙타클이 장면마다 외삽하는 기호다. 시사회장에 사열한 386 부르주아 정객들과 박근혜씨 등속들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5.18 실재사진     ©벼리
그래 그건 혁명이 아니었어. 그 날은 아련한 폭력과 대책 없는 광기와 안타까운 사랑의 멜로였어. 맞아, 그건 휴머니즘이었지. 사람들이 저토록 아름답다니, 죽어서도 저토록 웃다니, 이건 인간 드라마야. 민우(김상경 분)의 외침은 진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저들은 폭도가 아니야! 또 신애(이요원 분)의 표정을 봐. 죄의식에 가득한 저 표정. 우리는 잊지 않지. 그러나 이건 혁명은 아니야. 왜냐하면 실패했거든. <화려한 휴가>의 극적 재현장치가 거둔 효과가 이런 것이다.
 
장 뤽 고다르는 관객들은 영화관 안과 밖이 어떻게 다른지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을 고전적으로 표현하면 아마 ‘불신의 자발적 중단’(Coleridge) 정도가 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불신을 거둔다는 것은 극의 전개가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사실로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발성은 극장을 벗어나자마자 스스로를 배반한다.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게다. <화려한 휴가>는 이러한 극적 장치를 역사라는 실재 사실을 통해 구현한다.
 
어쩌란 것인가? 그것이 허구에 불과하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5·18은 허구가 아니고 기억이며, 오히려 트라우마고, 영화야말로 그것을 허구로 각색한다. 사후에 나타나 사건을 재구성하는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처럼 영화는 스펙타클의 줄을 타고 내려와 5·18의 기억을 네러티브화하고 장면화하며, 기억을 더 깊숙한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
 
게다가 그것이 눈물 나는 멜로(민우와 신애)와 영웅주의(박흥수-안성기 분)의 음침한 지하로부터 울려 나오는 명령이라면, 이때 혁명은 더 이상 현재화되지 않으며, 민중의 학교(Marx)도 아니며 패배를 치받고 나가는 쇳덩어리 기차(Marx)도 아닌 것이다. 기념비로서의 역사(Nietzsche), 기념일로서의 5·18, 박물관에 소장된 기억, 그렇게 쇠락해 간다. 
 
▲ 전남 도청앞을 가득메운 광주시민들     ©벼리
나는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의도적으로 혁명의 무덤을 축조하려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리고 너무 무딘 자의식으로 너무 벅찬 역사를 껴안으려고 했다. 작가의 변에서 김지훈 감독은 ‘화해’(도대체 누구와?)를 얘기하지만, 혁명에 화해란 없다. 그날을 겪었던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폭력’이라는 피가 뚝뚝 듣는 언어로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 그 날이 오면 두 번 실패하지 않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모든 혁명은 단두대를 필요로 하며, 거기 압제자의 피가 묻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그날의 압제자, 파쇼의 무리들은 어디 있는가?). 그래서 어느 날 실패한 듯 보이는 혁명은 다음 날 되살아나며, 그 다음날 또 되살아나며, 되살아난다. 그러므로 혁명은 실패하지 않고 유예될 뿐이다. 이 유예된 혁명의 본성이 모든 지배자들을 떨게 만든다. 
 
이 영화는 그런 혁명의 본성을 철저히 유린한다. 그리고 전시한다. 파쇼의 개들이 아직 살아 있고, ‘서울역 회군’을 결의한 그날의 예비군들이 부르주아 의회를 누비며 대권을 넘보고 있으며, 그들이 와서 또한 영화를 보았으며 떨지 않았고, 그러기는커녕 눈물 흘렸으며 충분히 공감했다.

400만을 넘어서는 흥행 성적을 앞에 두고 CJ와 ‘기획시대’가 겸손할 수 있을까? 그들이 전시한 혁명의 핏자국들에 대해 허투로라도 죄의식을 느낄 수 있을까? 이 사람들이 저 부르주아 어중이떠중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는 못할망정 그들이 자신의 죄과를 대중의 죄의식과 동일시하면서 눈물 한 번 훔치고, 극장을 나서자마자, 그래 이건 허구야, 라고 생각하도록 황금의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생각할까? 
 
▲무장한 시민군들     ©벼리
5·18은 기념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 권력과 부르주아, 파쇼들에게는 늘 되살아나는 피의 카니발이며, 공포고, 세상의 모든 다중(multitude)과 민중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축제일뿐이다. 그래서 5·18은 휴머니즘이라는 위선의 탈을 쓰지 않고, 기억 속에 묻히지 않는다. 5·18은 혁명-기계며, 전쟁-기계며, 다시 반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 마지막 장면, 결혼식에서 웃고 있는 저 영혼들은 거짓이다. 현실의 종막(終幕)에서 저 망령들은 땅으로부터 일어나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시퍼런 단두대를 도시 한 가운데 천천히 세우게 될 것이다. 다시 총을 들 것이며 모든 것을 되갚을 것이다. 그게 진실이다. - NomadIa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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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8/12 [03:3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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