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체결하는 FTA는 워낙 많은 분야를 다룰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사안을 규율하려 들기 때문에, 협정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국회의 법안심사소위원회 수준 이상의 검토가 필요하다. 올해 2월에 한미FTA 협상 개시를 선언하기 전에는 물론 3차 협상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도 우리 정부는 협정문의 내용을 국회에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 영어로 된 원문을 의원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 허용하고 메모조차 안된다고 한다. 한국에서 의정활동을 제대로 하려면 카메라 필름에 맞먹는 망막을 보유하고 있어야 할 판이다.
한미FTA 협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협정문의 초안은 어떻게 작성해서 미국측에 제안했는지는 이해관계인은 물론 국민 개개인에게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왜냐하면, 한미FTA와 같은 조약은 체결과 비준에 대한 국회 동의를 거쳐야 하고 이렇게 체결, 공표된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져 앞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한미FTA 협정문 초안을 비밀로 취급하고, 국회의 FTA 특위에도 협정문 초안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래서는 관련 이해당사자가 제대로 된 의견을 주고 싶어도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1차 협상 전후에 국회에 예상 쟁점, 협정문 초안, 우리의 대응 전략, 1차 협상 결과를 보고했고, 미국 정부와 달리 언론 브리핑을 통해 협상 결과를 국민들에게 충분하게 공개했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낱낱이 내용을 공개한다는 1차 협상 결과 공개 자료를 보면 어이가 없다. 지적재산권 분야에 대해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내용은 단 2줄이다. "미측은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50년 →70년), 지재권 침해에 대한 법집행 강화(법정손해배상제도, 비친고죄 적용확대)를 요구", "양측은 각종 쟁점에 대한 양국간 기본입장과 제도 현황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상당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 협정문의 통합에는 합의". 여기서 두 번째 줄은 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정보이고, 첫 번째 줄은 미국이 그동안 체결했던 FTA를 조금이라도 보았다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의 극히 일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외교통상부가 굳이 공개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달 초에 노 대통령은 문서를 공개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어느 선진국에 비해서도 손색없는 최고 수준의 정보 공개를 하겠다면서 대통령이 보고받는 수준을 정보 공개의 범위로 제시했다. 어느 수준의 정보 공개가 필요한지는 굳이 다른 나라까지 갈 필요도 없이 한미FTA의 협상 상대방인 미국을 보면 된다. 미국은 FTA 본협상을 하려면 90일 전에 의회에 통보해야 하고,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의견 수렴 과정에 반드시 포함되도록 미국 의회가 법으로 정한 외부 자문위원회만 해도 수 십개이고 공식 위원만 700명이다. 위원 중에는 회원사가 수백 개에 달하는 협회 소속 위원도 있고, 학계와 공익단체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협정문 초안을 모두 다 본다. 1차 협상을 하기 전에, 미국의 어느 협회에 미국 의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한미FTA 협정문 초안의 구체적인 문구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협상 내용을 공개하라는 것이 협정문을 길거리에 방으로 부치라는 얘기가 아니다. 수 십장에 걸친 복잡한 내용을 단 2줄로 요약하고 충분한 공개라는 억지를 부리지는 말라는 것이다. 대통령 보고 수준의 정보 공개를 약속한 정부가 앞으로 무엇을 내놓을지 두고 볼 일이다. 과연 대통령이 협상 내용을 제대로 알고나 있기는 한 것인지, 고도의 통치행위를 어느 정도의 정보에 기초해 하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기회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FTA 괴담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터이다. * 본문은 한미FTA저지 범국본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 글쓴이는 지적재산권공동대책위 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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