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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즈 워드 ‘어머니’에 가려진 김영희
[정문순 칼럼] 자식의 출세 여부로 어머니 노력가치를 재는 천박함이여
 
정문순   기사입력  2006/02/20 [12:29]
언론이 쏟아내고 있는, 미국 프로풋볼의 영웅으로 떠오른 하인즈 워드 선수 모자의 이야기는 역경과 극복, 성공이라는 입지전의 표준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민 여성의 자식, 한부모가정, 비백인, 가난이라는 소수자의 조건을 모조리 한 몸에 짊어진 청년은 어머니의 격려와 헌신에 힘입은 각고의 노력으로 모든 난관을 물리치고 인생 역전의 성공 신화를 일구어낸 극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어머니의 정성과 상관없이 스포츠선수로서 하인즈가 가진 특출한 재능도 있었겠지만 그것 역시 어머니의 극진한 자식 사랑이 아니었다면 약자에게 기회를 주는 데 인색한 나라에서 갈고 닦여 빛을 발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한국언론이 풋볼 영웅보다 더한 영웅으로 만들고 있는 건 그의 어머니 김영희 씨다. 가난한 이민 여성으로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몸이 가루가 되도록 아들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 김영희 씨는 영웅을 길러낸 슈퍼 히어로로 부각되고 있다.

언론이 김영희 씨를 통해 만들어내는 슈퍼 영웅 신화는 자식의 성공 뒤에는 으레 어머니의 뒷바라지가 있다는 세간의 끈질긴 통념을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여성의 행복은 어디까지나 자식이 잘 되는 데 있다는 식의 사고도 이런 때를 틈타 힘을 얻는다.

이 신화에서 여성 김영희는 사라지고 하인즈의 어머니만 남는다는 것, 김영희라는 존재를 포기하고 하인즈의 어머니라는 거름을 택한 여성의 삶은 자기 삶을 꿈꾸는 독립적 여성과는 분명 먼 거리에 놓여 있다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뒤로 물리칠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되는 게 여성의 삶이다. 남편도 없고 낯선 땅에서 자식이 있는 여자가 자신의 삶을 버리고 자식에게 투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먼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행복은 나중에 여유 있을 때 찾든지 아니면 자식의 출세만으로 고생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라는 식의 믿음은 매우 강력하다. 김영희 씨가 겪은 고초가 아무리 아들을 위해 바쳐진 것이라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 삶의 일부에 속한다는 것, 자식의 성공으로 자신의 삶을 보상받을 수 있다거나 대리만족이 가능하다는 사고가 얼마나 순진한가 하는 점은 거들떠보는 이가 없다. 한 사람으로서 여성의 삶은 그만큼 대수롭지 않게 취급될 뿐이다.

더욱이 어디까지나 슈퍼 영웅의 탄생이 빚지고 있는 건 자식의 뒷바라지나 밑거름 역할에 만족할 수 없는 여성들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이 없다. 김영희 씨에게 세간의 들뜸과 흥분이 쏟아질수록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지향하는 여성들에 대한 냉소나 비아냥이 가깝게 들린다.

따지고 보면, 김영희 씨가 아들을 위해 삶을 통째로 헌신했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남 얘기 그럴싸하게 꾸미기 좋아하는 언론의 상상력에 가깝다. 김씨가 하루에 3가지 일을 14시간 넘게 했다는 사실이 오로지 아들만을 위한 뒷바라지라고 단정지을 근거는 없다.

자식이 딸린 가난한 이민 여성에게 주어진 자유가 생존을 위해서 잠자는 시간 빼고 소처럼 일하는 것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려운 추측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권과 관련한 문제에 김씨가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아들을 위해 자초한 고생이라고 단정짓는 건 참으로 순진하다.

그녀라고 해서 먹고사는 것, 자식을 부양하는 것 외에 자신의 삶을 가꾸는 데 시간을 쏟고 싶은 꿈이 없었을까. 낯선 땅으로 건너간 것도 더 나은 삶을 꿈꾸었기 때문일 텐데.

그러나 초인적인 노동 없이는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빈곤 여성의 삶이 얼마나 안타깝고 몸서리처지는 것인지는 한국 언론의 관심사가 아니다. 마소처럼 일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들에게 성공하는 법을 익혀주기 위해 죽으라고 일했다는 말인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처절한 여성의 삶은 어느새 숭고한 모성 신화로 둔갑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김영희 씨처럼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모든 아들이 하인즈 워드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의 헌신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만약 아들이 스타 플레이어가 안되었을 경우 김영희 씨의 희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일까.

입신양명으로 백세에 이름을 날리는 것이 효도라는 유교적 가치관이 속물적으로 변주돼버린 사회는 이런 질문에 대한 변변한 대답조차 감당할 수 없다. 김영희 씨가 바란 건 꼭 아들이 유명해지고 떼돈을 버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가진 것 없다는 이유로 기회를 얻지 못한 자신과 달리 당당하게 날개를 펴는 것이 아들에게 바란 삶이었을 것이다.

자식의 출세 여부로 어머니의 노력의 가치를 재는 천박함에다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태도, 자신의 삶을 밀쳐둘 수밖에 없는 빈곤 여성의 처지에 대한 무관심이 한데 모여 한 여성의 쉽지 않은 삶은 '한국의 어머니'의 표상으로 변질돼버렸다.

한국이 자랑하는 어머니 상에 여성 김영희는 없고 자신의 삶을 내팽개치고 아들에게만 집착하는 극성엄마만 남아 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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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2/20 [12:2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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