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주선회 재판관)는 자녀가 아버지의 성을 따라야 한다는 이른바 '부성주의'를 원칙으로 규정한 민법 제781조 제1항에 대해 재판관 7대1의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헌재는 재혼자녀·입양자녀 등 아무런 예외를 인정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위헌성을 인정했을 뿐 부성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합헌이라는 의견을 내 비판을 받고 있다.
사망한 아버지의 성을 가지고 있던 곽 아무개 씨 등 2명은 어머니 김 아무개 씨가 이 아무개 씨와 재혼하자 새아버지의 성을 따르고 싶다며 서울지법 북부지원에 호적정정 신청을 했다.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 이 사건 조항이 헌법에 위반된다며 위헌법률심판제정을 신청했고 2001년 4월 법원은 신청을 받아들여 헌재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바 있다.
이 조항은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한 호주제 폐지 개정 민법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는 단서와 "자의 복리를 위하여 자의 성과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부, 모 또는 자의 청구에 의하여 법원의 허가를 받아 이를 변경할 수 있다"는 조항이 추가되어 2008년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를 감안한 헌재는 단순위헌을 선언할 경우 발생할 법적 공백을 방지하기 위해 2007년까지는 효력을 잠정 적용하는 헌법불합치 주문을 선택했다.
다수의견을 낸 윤영철·금효종·금경일·주선회·이공현 재판관은 "부가 사망하거나 부모가 이혼한 후 모가 양육하고 있던 자를 데리고 재혼하는 경우, 재혼한 모의 자가 계부의 성을 따르고자 하는 경우…개인의 생활관계에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생물학적 부의 혈통을 성으로 상징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새로이 형성된 가족이 사용하는 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내부적으로 정서적 통합에 방해가 되고 대외적으로는 가족의 구성에 관련된 비우호적인 호기심과 편견을 유발하기도 한다"며 "부부와 친생자로 구성되는 통상적인 가족만을 상정하고, 그 밖의 예외적인 상황에 처한 가족의 구성원이 겪는 구체적이고도 심각한 불이익에 대해서는 실질적이고 궁극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입법형성의 한계를 벗어나 개인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부성주의는 규범이전에 생활양식…합헌" 하지만 이들은 부성주의 자체는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동서양의 많은 문화권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부성주의는 규범으로서 존재하기 이전부터 생활양식으로 존재해 온 사회문화적 현상이었고 오늘날에 있어서도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은 여전히 부성주의를 자연스러운 생활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성은 가족이나 친족의 범위, 재산의 상속 등 가족법상 개인의 구체적인 권리의무에 대해 아무런 실체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부성주의로 인한 사실상의 차별적 효과는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침해하는 정도에 이른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최이윤정 '또 하나의 문화' 사무국장은 "부성주의가 상징이고 이에 따른 차별은 없다는 헌재 판단은 재혼자녀나 입양자녀가 실제로 차별받는다는 스스로의 판단과도 모순된다"며 "부성주의라는 상징이 실제로 차별을 양산하는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정상가족'뿐 아니라 별거가족·동거가족·동성애 가구·독신 가구 등 다양한 가족형태가 늘어난 현실에서 부성주의는 공동체 유대관계에 오히려 해가 될 뿐이라는 것.
부성주의는 관습헌법?…성에 대한 자기결정권 확대돼야 또 최이윤정 사무국장은 "헌재 결정을 요약하면 결국 (옛아버지의 성 대신) 새아버지의 성을 따를 수 있도록 예외조항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왜 아버지의 성을 따라야 하느냐는 문제의 핵심은 비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헌재는 성을 바꾸는 것이 가족·친족 체계를 흔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흔든다고 가족·친족이 해체되는 것은 아니"라며 "가족에 대한 의무나 친족에 대한 의무가 과도하게 가부장 중심으로, 성을 중심으로 지워지는 시스템에 대한 도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호주제 폐지의 계기가 된 위헌소송의 공동변호인이었던 진선미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부성주의가) 양성평등에는 반하지만 실질적인 필요가 있다는 논리라면 모르겠지만 부성주의가 원칙적으로 합헌이라는 다수의견은 충격적"이라고 평가했다. 진 변호사는 "양성평등뿐 아니라 개인의 성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강조되는 방향의 입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헌재 송인준·전효숙 재판관은 헌법불합치임을 공감하면서도 부성주의 자체도 위헌이라는 소수의견을 내 주목받았다. 이들은 "부성주의는 부와 남성을 중심으로 한 혈통 계승을 강제하여 부와 남성을 가족의 중심에 놓게 하여 가부장적 가치질서를 유지, 강화하고 가족 내 여성의 지위를 남성에 비해 부차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놓이게 하여 여성을 차별하고 있"다며 "부성주의가 오랜 기간 유지되어 왔으므로 오늘날에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전통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차별취급 해 왔으므로 현재도 그 차별취급이 정당하다는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주연 세계화반대여성연대 활동가는 "부성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은 유지하면 되지만 부성주의를 가치있다고 판단한 것은 큰 문제"라며 "사회적 편견이라는 말로 차별현실을 모호하게 표현했을 뿐 그 차별을 유지해왔던 가부장제에 대해서는 침묵해 결과적으로 이를 유지하고 싶다는 욕망을 헌재가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개인별 신분등록제 논의에도 악영향 이번 헌재 결정은 호주제 폐지 이후 호적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개인별 신분등록제 논의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4일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국적 및 가족관계의 등록에 관한 법률안'은 자식이 어머니의 성을 따를 경우 취지 및 사유를 담은 신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부성주의'가 합헌이라는 헌재 결정에 따르면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경우는 원칙에 대한 '예외'가 되므로 이런 신고서 작성도 당연한 일이 된다.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위한공동행동 타리 활동가는 "사실상 어머니의 성을 선택하기 어렵도록 하는 장치"라며 "개인별신분등록제는 부계혈동이나 가문을 잇는 것으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보장을 위해 자신의 정보를 등록하고 활용하는 것이므로 대체법안에서는 개인의 성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통제와 개입을 배제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모성 함께쓰다보면 성이 끝없이 길어진다? 한편 헌재 다수의견은 '부성주의 합헌'의 한 근거로 '부모성 함께쓰기'에 대한 평가를 들어 눈길을 끌었다. 다수의견은 "부모의 혈통을 모두 성에 반영하고자 부의 성과 모의 성을 결합하여 사용한다면 세대를 거치면서 성이 끝없이 길어져 개인을 특정하는 기호로는 매우 적합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황당하다"고 말을 꺼낸 최이윤정 사무국장은 "부모성 함께쓰기는 부성혈통 중심으로 이어지는 부계 중심의 가족주의를 문제삼는 상징"이라며 "'이름만 쓰기'나 '별칭 쓰기' 등 성 선택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는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논의를 차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권성 재판관은 부성주의는 물론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합헌이라는 반대의견을 내 빈축을 샀다. 그는 "문화가 항상 헌법에 선행하는 경우도 있다"며 "가족제도, 그 중에도 부성주의 같은 것은, 분명히 헌법에 선행하는 문화의 하나"라는 논리를 폈다. 이어 "부자관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모자관계의 그것에 비하여 본질적으로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며 "부성주의는 자의 부계혈통을 대외적으로 공시하는 기능을 가지는 동시에 생래적으로 모에 비해 약화되기 쉬운 부와 그 자녀간의 일체감과 유대감을 강화하여 가족의 존속과 통합을 보장하는 기능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또 "재혼이나 입양사실이 노출됨으로써 개인이 받는 불이익은 재혼이나 입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그 원인이지 부성주의가 그 원인은 아니"라며 '사회적 편견'에 책임을 미뤘다.
* [인권하루소식] 2005년 12월 24일자 (제296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